2021/12 20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안희연 2021 올해 알게 된, 멋진 시인이다. 얼핏 읽으면 이게 뭔가 싶다가도, 다시 읽으면 머리에 진동이 울린다. 좋다. p. 12~13 소동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

북리뷰/문학반 2021.12.31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김재진 p. 36~37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 만나러 가느라 서둘렀던 적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 도착하지 않은 당신을 기다린 적 있습니다. 멀리서 온 편지 뜯듯 손가락 떨리고 걸어오는 사람들이 다 당신처럼 보여 여기에요, 여기에요, 손짓한 적 있습니다. 차츰 어둠이 어깨 위로 쌓였지만 오리라 믿었던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입니다. 어차피 삶 또한 그런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오지 않듯 인생은 지킬 수 없는 약속 같을 뿐 사랑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실망 위로 또 다른 실망이 겹쳐지며 체념을 배웁니다. 잦은 실망과 때늦은 후회. 부서진 사랑 때문에 겪는 아픔 또한 아득해질 무렵 비로소 깨닫습니다. 왜 기다렸던 사람이 오지 않았는지, 갈망하면서도 왜 아무것도 이루어지는 것..

북리뷰/문학반 2021.12.30

[쓸쓸해서 머나먼] 최승자

최승자 2010 p. 13 세월의 학교에서 거리가 멀어지면 먼 바다여서 연락선 오고 가도 바다는 바다 섬은 섬 그 섬에서 문득 문득 하늘 보고 삽니다 세월의 학교에서 세월을 낚으며 삽니다 건너야 할 바다가 점점 커져 걱정입니다 p. 32~33 어떤 한 스님이 어떤 한 스님이 한 백 년 졸다 깨어 하는 말이 "心은 心이요 物은 物이로다"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잘 섞이면 心物이 만들어지고 物心이 만들어지고 사다리의 어느 위 계단으로 올라가면 초롱초롱 조롱박들이 한창 열려 있다 그리하여 心物이 物心이 되고 物心이 心物이 되고 (실인즉슨 心이 物이 되고 物이 心이 되고) 한번 해보자 하면 그 구별들은 한이 없고 그런 것이 아니오라 하면 순식간에 똑같은 세상이 된다 (아주 우울한 날에는 우윳빛 막걸리를 한두 잔..

북리뷰/문학반 2021.12.30

[대추 한 알] 장석주 시인의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장석주 시선집 2021 p. 30~31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나는 안다, 내 깃발은 찢기고 더이상 나는 청춘이 아니다. 내 방황 속에 시작보다 끝이 더 많아지기 시작한다. 한번 흘러간 물에 두 번 다시 손을 씻을 수 없다. 내 어찌 살아온 세월을 거슬러올라 여길 다시 찾아올 수 있으랴. - 쉽게 스러지는 가을 석양 탓이다. - 잃어버린 지도 탓이다. 얼비치는 벗은 나무들의 그림자를 안고 흐르는 계곡의 물이여, 여긴 어딘가, 내 새로 발 디디는 곳 암암히······ 황혼이 지는 곳. - 서편 하늘에 풀씨처럼 흩어져 불타는 새들. - 어둠에 멱살 잽혀 가는 나. p. 32~33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희망은 절망이 깊어 더이상 절망할 필요가 없을 때 온다. 연체료가 붙어서 날아드는 체납이자 독촉장처..

북리뷰/문학반 2021.12.30

[부동산 등기부 열람] 부동산 등기부 인터넷 발급

최근에 부동산 등기부 열람이 필요한 일이 있었다. 보통은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통해서 발급을 받아서, 개인적으로 이게 필요한 일은 처음이었다. 집 앞 부동산에 들릴까라는 생각도 잠시 했는데, 굳이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니까. 내가 잘하는 검색을 하자. 인터넷 검색창에 부동산 등기부 인터넷 발급이라는 항목을 쳐보니, 바로 발급이 가능한 사이트가 보였다. 그 아래에 있는 항목들을 열어보아도, 똑같은 사이트가 열려서 마치 인터넷 발급은 그곳을 통해서만 가능한듯한 느낌이 들었다. 별 의심(?)도 없이, 등기부가 필요한 주소를 치고 확인을 누르니, 발급 수수료에 7천 원 가까이 되는 비용이 보였다. 순간 드는 생각이, 이 정도의 비용이면 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 발급비용을 받을 거 같다는 느낌? 그럼..

끄적끄적 2021.12.29

[맨발] 문태준 시집

문태준 시집 2004 p. 12 한 호흡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p. 30~31 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북리뷰/문학반 2021.12.28

[꽃을 보듯 너를 본다] 나태주 시인의 인터넷 시집, 한 사람 건너

나태주 시집 2015 p. 26 한 사람 건너 한 사람 건너 한 사람 다시 한 사람 건너 또 한 사람 애기 보듯 너를 본다 찡그린 이마 앙다문 입술 무슨 마음 불편한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꽃을 보듯 너를 본다. p. 37 너를 두고 세상에 와서 내가 하는 말 가운데서 가장 고운 말을 너에게 들려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가진 생각 가운데서 가장 예쁜 생각을 너에게 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표정 가운데 가장 좋은 표정을 너에게 보이고 싶다 이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진정한 이유 나 스스로 네 앞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다. p. 46 꽃 1 다시 한 번만 사랑하고 다시 한 번만 죄를 짓고 다시 한 번만 용서를 받자 그래서 봄이다. p. 72 행복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

북리뷰/문학반 2021.12.27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 그만 쓰자 끝.

최승자 이 책은 1989년 출간되었던 첫 판본(1976년부터 1989년까지의 기록)에, 1995년부터 2013년까지의 기록을 추가하여 2021 올해 다시 출간된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이다. 책에는 옮겨 적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일부만 옮기면 글이 깨져서 의미가 없는. 만약 글을 쓴다면 쓸 수 있다면, 이분처럼 이렇게 쓰고 싶다. p. 14~15 중에서. 때로 한 10년쯤 누워 있고만 싶어질 때가 있다. 모든 생각도 보류하고 쉽게 꿈꾸는 죄도 벗어버리고 깊이깊이 한 시대를 잠들었으면. 그러나 언젠가 깨어나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의 황량함, 아아 너무 늦게 깨어났구나 하는 막심한 후회감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결국 그 거대한 타의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인간답게 ..

북리뷰/문학반 2021.12.27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새로운 산문집, [계절 산문],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박준 산문집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일은 잘 없는데, 유일하게 두 번 정주행한 우리나라 드라마가 있다. 바로 라는 드라마이다. 캐릭터와 잘 맞는 캐스팅, 그리고 엮어 내는 과정, 중간중간 작가가 전하고 싶어 하는 말들이 무언가 좋았다. 물론 어색하거나 쌩뚱맞은 부분이 어느 정도 있는 장면들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눈감아줄 만했다. (정주행이라는 의미를 잠시 언급하고 가자면, 사전적으로는 연재되는 글이나 만화 또는 드라마나 영화의 시리즈물 따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나는 정주행레이서에 속한다. 정주행 레이서는 시리즈물을 1편부터 마지막 편까지 몰아보는 '정주행'과 경주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레이서'의 합성어로, 일정한 주기로 연재될 때마다 보는 것이 아니라, 시리즈를 통째로 ..

북리뷰/문학반 2021.12.27

[마리모] 마리모 떠오름, 마리모 키우기

올해 11월에 마리모가 처음 떠오른 것을 보고, 신이 나서 포스팅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물만 갈아주면(보통 저녁에 갈아주는데) 다음날 점심때쯤 돼서 마리모들이 둥둥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뜨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처음 한두 번은 정말 행운이 몰려오나 싶을 정도로 신기해서, 뜰 때마다 그 앞에 손을 모으고, 마치 달을 향해 빌듯이 속으로 소원을 빌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물을 갈아줄 때마다 떠오르니, 뭐 '오늘도 떴구나' 싶은 것이다. 그동안 소원 빌었던 게 우습기도 애처롭기도 하게 말이다. 그런데, 똑같이 물을 갈아주는데도 옆에 있는 큰 마리모는 떠오르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오늘 시험을 해봤다. 결과는 내일 오전이 지나야 알 수 있겠지만. 원래 큰마리모가 있던 작..

끄적끄적 2021.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