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일 2020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63~65 연애의 뒤편 뒷문을 연다. 뿌리 깊지 않은 하늘 끝이 붉게 물들어 있다. 비행운이 어지럽게 풀어지고 몸이 서쪽으로 기운다. 열하루 상현달이 떠 있다. 밟지 않고 오른 달의 아홉 계단을 내린다. 계단에 새겨진, 골목 안쪽에서 들려오던 낡은 오토바이 소리 천 개의 시린 손을 가진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위로 가부좌를 튼 회색빛 구름 낮게 떠 흐른다. 등불이 먼저 켜지는 그림자 짙은 저층의 집들 표정 없던 서쪽 창문에 피가 돈다. 실어증 앓는 변압기가 침묵의 위쪽에 겨우 매달려 있다. 물 흐르는 소리 들리지 않아도 뒤란에 서 있는 나무는 침묵으로 제 키를 조금씩 키운다. 주름을 제 몸에 새김으로 나무들은 뿌리의 시간을 펼쳐 보인다. 주름보다 내 뒤편에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