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7

[내 무덤, 푸르고] 최승자 시집

최승자 1993 최승자 1993 p. 11 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3 생명의 욕된 가지 끝에서 울고 있는 죽음의 새, 죽음의 헛된 가지 끝에서 울고 있는 삶의 새. 한 마리 새의 향방에 관하여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리라. 하늘은 늘 푸르를 것이다. 보이지 않게 비약의 길들과 추락의 길들을 예비한 채. 마침내의 착륙이 아니라. 마침내의 추락을 예감하며 날아오르는 새의 비상ㅡ 파문과 ㅍ문 사이에서 춤추는 작은 새의 상한 깃털. 미망(未忘): 아닐 '미', 잊을 '망' - 잊을 수가 없음 비망(備忘): 갖출 '비', 잊을 '망' - 잊지 않게 하려는 준비 p. 16 未忘 혹은 備忘 8 내 무덤, 푸르고 푸르러져 푸르름 속에 함몰되어 아득히 그 흔적조차 없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개울들 늘 이쁜 물소리로 ..

북리뷰/문학반 2022.01.27

최승자 [즐거운 일기]

최승자 1984 최승자 1984 p. 33~34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

북리뷰/문학반 2022.01.11

최승자 [기억의 집]

최승자 1989 최승자 1989 p. 14 이제 전수할 이제 전수할 슬픔도 없습니다. 이제 전수할 기쁨도 없습니다. 떠납니다. 막막 하늘입니다. 떠나지 못합니다. 배고픔뿐인 그대와 배고픔조차 없는 내가 피하듯 서로 만나 배고픈 또 한세상을 이룩하는 것을 고장난 신호등처럼 바라봅니다. (꿈이여 꿈이여 늙으신 아버님의 밑씻개여) p. 15 길이 없어 길이 없어 그냥 박꽃처럼 웃고 있을 뿐. 답신을 기다리지는 않아요. 오지 않을 답신 위에 흰 눈이 내려 덮이는 것을 응시하고 있는 나를 응시할 뿐. 모든 일이 참을 만해요. 세포가 늙어 가나봐요. 가난하지만 이 房은 다정하군요. 흐르는 이 물길의 정다움. 물의 장례식이 떠나가고 있어요. 잊으시지요. 꿈꾸기 가장 편리한 나는 무덤 속의 나니까요. 방(房): 방 '..

북리뷰/문학반 2022.01.06

최승자 [빈 배처럼 텅 비어]

최승자 2016 최승자 2016 p. 9 빈 배처럼 텅 비어 내 손가락들 사이로 내 의식의 층층들 사이로 세계는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어언 수천 년 빈 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 p. 18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내가 운들 무엇이며 내가 안 운들 무엇이냐 해 가고 달 가고 뜨락 앞마당엔 늙으신 처녀처럼 웃고 있는 코스모스를 p. 26 당분간 당분간 강물은 여전히 깊이깊이 흐를 것이다 당분간 푸른 들판은 여전히 바람에 나부끼고 있을 것이다 당분간 사람들은 각자 각자 살 살아 있을 것이다 당분간 해도 달도 날마다 뜨고 질 것이다 하늘은 하늘은 이라고 묻는 내 생애도 당분간 편안하게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p. 31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그라너저러나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래도 언제나..

북리뷰/문학반 2022.01.04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최승자 1981 최승자 시인은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에서 '이 시대의 사랑'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 시집은 첫 시집인 것이다. 스스로를 누르고 있는 절망이나 슬픔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그 속에 빠져있는 시인의 시 세계가 암울하기 그지없다. 조금은 들뜬 사랑노래를 기대했다면, 첫 시를 읽는 순간 내려놓아야 한다. p. 9 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

북리뷰/문학반 2022.01.01

[쓸쓸해서 머나먼] 최승자

최승자 2010 p. 13 세월의 학교에서 거리가 멀어지면 먼 바다여서 연락선 오고 가도 바다는 바다 섬은 섬 그 섬에서 문득 문득 하늘 보고 삽니다 세월의 학교에서 세월을 낚으며 삽니다 건너야 할 바다가 점점 커져 걱정입니다 p. 32~33 어떤 한 스님이 어떤 한 스님이 한 백 년 졸다 깨어 하는 말이 "心은 心이요 物은 物이로다"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잘 섞이면 心物이 만들어지고 物心이 만들어지고 사다리의 어느 위 계단으로 올라가면 초롱초롱 조롱박들이 한창 열려 있다 그리하여 心物이 物心이 되고 物心이 心物이 되고 (실인즉슨 心이 物이 되고 物이 心이 되고) 한번 해보자 하면 그 구별들은 한이 없고 그런 것이 아니오라 하면 순식간에 똑같은 세상이 된다 (아주 우울한 날에는 우윳빛 막걸리를 한두 잔..

북리뷰/문학반 2021.12.30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 그만 쓰자 끝.

최승자 이 책은 1989년 출간되었던 첫 판본(1976년부터 1989년까지의 기록)에, 1995년부터 2013년까지의 기록을 추가하여 2021 올해 다시 출간된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이다. 책에는 옮겨 적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일부만 옮기면 글이 깨져서 의미가 없는. 만약 글을 쓴다면 쓸 수 있다면, 이분처럼 이렇게 쓰고 싶다. p. 14~15 중에서. 때로 한 10년쯤 누워 있고만 싶어질 때가 있다. 모든 생각도 보류하고 쉽게 꿈꾸는 죄도 벗어버리고 깊이깊이 한 시대를 잠들었으면. 그러나 언젠가 깨어나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의 황량함, 아아 너무 늦게 깨어났구나 하는 막심한 후회감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결국 그 거대한 타의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인간답게 ..

북리뷰/문학반 2021.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