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20

[시] [마술 상점] 김신영 시집

김신영 2021 김신영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42~43 그때가 세상은 봄이다 살아온 마디만큼 응시가 깊어지고 당신을 그리워할 때가 되면 그때가 세상은 봄이다 새로워진 것이 하나둘 붉은 얼굴을 불러들이는 봄 얼굴 가득 들어찬 주름을 털어 내 나도 봄을 불러들인다 아린 기억이 만든 사랑도 봄이 되는 저녁 잊을 수 없어 두렵던 날도 봄빛을 담는다 두근거리는 저녁 사랑 하나 품어 몰래 간직한 바람, 숲, 안개가 봄빛이다 어딜 가나 당신이 있다 봄빛 나무 잔가지에서 눈을 반짝이고 무성한 이파리 속에도 당신이 있다 하얀 눈이 내려 덮인 산하에도 첫사랑 같은 문장이 스며 나무에 묶여둔 마음이 봄이 된다 인생이 어느 가시밭길을 갈지 모르나 연탄길 같은 다정을 키워보는 것 바람 부는 마음을 안고 걸어도 봄을 ..

북리뷰/문학반 2022.03.27

[시] [천 년 동안 내리는 비] 정한용 시집

정한용 2021 정한용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24~25 아무도 남지 않은 별에서 이틀 못 봐도 그립지 않은 당신, 두 해 못 만나도 보고 싶지 않은 당신, 이백 년 헤어지고도 하나도 아쉽지 않은 당신. 불편한 만남보다 격리된 소통이 더 편리하고 자연스런 불구의 시간들. 내일은 마스크를 살 수 있는 날, 아무도 그립지 않고 누구도 만날 수 없는 별에서 오로지 와이파이와 텔레파시의 기호들만 바쁘게 떠다닌다. 반죽처럼 부푼 우리 사랑은 폭탄이 되고 지워진 곳을 가득 채운 소리와 떨림과 냄새, 들숨과 날숨으로 주고받는 지독한 사랑의 바이러스들. 당신 어디에서 왔어? 이억 년을 뛰어넘어 배달된 카톡가 페북메시지가 우리 이마를 성스럽게 씻어준다. 지금은 유효하지 않은, 젖은 구원처럼. p. 34~36 천..

북리뷰/문학반 2022.03.26

[시] [생활이라는 생각] 이현승 시집

이현승 2015 이현승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0~11 저글링 내 손은 두개뿐인데 잡아야 할 손은 여러개다 애써 친절을 베풀면서 쉬운 사람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사람처럼 내가 잡아야 할 손들은 뚱한 표정을 하고 있다. 너무 빨리 돌아가는 회전문 안에서 우리의 스텝은 배배 꼬이고 뒤엉킨다. 회전과 와류를 빠져나가지 못해 우리는 빨래처럼 잔뜩 뒤엉키며 물이 빠진다. 아무나 막 목을 조르고 싶다. 남을 웃길 수 있는 능력을 남에게 웃음거리가 됐다고 번역하면서 우리는 자존심이 상한다. 슬픔을 팔고 있다는 수치의 감정이 우리를 화나게 한다. 손안에 쥐고 있는 얼음처럼 차가움에서 시작해 뜨거움으로 가는 악수, 내 손은 두개뿐이지만 여러개의 손을 잡고 있다. 와류: 물이 소용돌이치면서 흐름, 또는 그런 흐름..

북리뷰/문학반 2022.03.19

[시]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김태형 시집

김태형 2020 김태형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28~29 왜행성 먼 하늘을 올려다보니 심장 한 쪽이 무너지고 있는 게 보인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다 아직 한 쪽의 심장이 남아 있다 남은 심장 한 쪽으로 돌이킬 것인가 그 힘으로 얼음덩어리와 운석들이 가득한 곳으로 저 암흑까지 조금 더 가 볼 것인가 선명하고 밝은 심장 한 쪽이 거대한 운석의 충돌 때문에 생긴 것이라니 남은 한 쪽의 심장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 인생에서 사라지라고 했지만 정작 사라진 사람은 나였다 그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나는 한동안 보이지 않는 것을 지키려고 보이지 않아야만 했다 남은 심장 한 쪽에 얼어붙은 대평원이 없었다면 한 쪽의 심장마저 잃고야 말았을 것이다 궤도를 끊고서 떠돌다가 먼지가 되거나 파편이 되어 다시 돌이키려 ..

북리뷰/문학반 2022.03.18

[시]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이제니 시집

이제니 2019 이제니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3 나무 식별하기 그 나무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무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평생 제 뿌리를 보지 못하는 나무의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 눈과 그 귀와 그 입에 대해서,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에도 나무는 자라고 있었다. 나무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밤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있다. 나는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너도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밤과 나무는 같은 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늘과 그늘 사이로 밤이 스며들고 있었다. 너는 너와 내가 나아갈 길이 다르다고 말했다. 잎과 잎이 다르듯이, 줄기와 줄기가 다르듯이, 보이지 않는 너와 보이지 않는 내가 마주 보고 있었다.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꿈에서..

북리뷰/문학반 2022.03.17

[시]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박형준 시집

박형준 2011 박형준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18~119 창문을 떠나며 지층이라는 주소에서 오래 살았다 창문 밖 감나무와 옆집 담쟁이덩굴 집으로 돌아올 때면 흐리멍텅해진 눈빛 같은 것이지만 밤늦게 시를 쓰려고 내다보면 그 눈 속에 차오르는 야생의 불꽃 창문에 가득하였다 가난이 있어 나는 지구의 이방인이었다 가로등의 불빛과 어둠에 섞인 두 그루의 식물이 영혼이었다 담쟁이덩굴은 기껏 옆집 난간을 타고 고작 2층에 머무르지만 지층의 창문에서 올려보면 언제까지나 야생의 울음으로 손짓했다 감나무의 이파리는 계절이 바뀌면 햇빛 속에 들어 있는 온갖 바람을 느끼게 했다 나는 언제까지고 겸손한 무릎으로 지구를 찾아온 나무여야 하리라 현재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 실상을 꿰뚫어 보려는 시선을 지녀야 ..

북리뷰/문학반 2022.03.16

[시] [오늘 밤에는 별 대신 그리움 하나] 채만희 시집

채만희 2020 채만희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2 바람에 관하여 바람을 쐬러 나간다고 하면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부는가 하겠지만 사실 바람은 부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지 날아다니다 보면 부딪치는 일이 많지 부딪칠수록 힘은 커지지 풀잎 같은 것들은 살랑거리지만 전선 같은 것들은 윙윙거리며 큰 소리를 내지 소리는 소리끼리 부딪쳐 오해의 조각들로 쪼개지지 이름도 제 각각이어서 해풍, 육풍, 골바람, 산바람, 높새바람으로 불리지만 이름도 날아간다는 것도 진실은 아니야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바람은 부딪치며 소리를 만드니까 타자를 매개로 은밀히 술렁거리는 소문처럼 어디로 뛸지도 몰라 그러다가 바람은 허공에 뜨고 말지 각각의 이름으로 불리는 바람처럼 처음부터 나란 없었던 거지 그러니..

북리뷰/문학반 2022.03.15

[시] [상처적 체질] 류근 시집

류근 2010 慕月堂(모월당): 사모할 '모', 달 '월', 집 '당' 류근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2 獨酌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獨酌(독작): 홀로 '독', 술 부을, 따를 '작' : 술을 따라 주거나 권하는 상대가 없이 혼자서 술을 마심 p. 14~15 법칙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

북리뷰/문학반 2022.03.14

[시] [눈앞에 없는 사람] 심보선 시집

심보선 2011 심보선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34~35 텅 빈 우정 당신이 텅 빈 공기와 다름없다는 사실. 나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손으로 쓰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투명한 손이 무한정 떨리는 것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향해 미소를 짓습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 우연에 대하여 먼 훗날 더 먼 훗날을 문득 떠올리게 될 것처럼 나는 대체로 무관심하답니다. 당신이 텅 빈 공기와 다름없다는 사실. 나는 고백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입으로 말하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투명한 입술이 하염없이 떨리는 것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신비로운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날. 내일은 진동과 집중이 한꺼번에..

북리뷰/문학반 2022.03.12

[시] [귀를 씻다] 이선식 시집

이선식 2020 이선식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32~33 가난 당신 생각이 저렇게 두서없이 흩날려도 되는 것일까? 속절없이 또 눈발은 날리고 산골버스에서 내린 한 낯선 여인이 눈길을 걸어가네 한겨울 산간벽지에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부귀영화보다 따사로운 호사 가난이 어찌 배고픔뿐이랴 나는 먼데 사람이 궁금해 손바닥으로 눈을 받아 눈점(卜)을 쳐 본다 손바닥에서 녹은 눈이 방울지면 그도 나를 생각하는 거라는 속설 가진 거라곤 적막뿐인 집에 산까마귀들이 내려와 왼종일 부산을 떨다 갔다 이내 뱀처럼 긴 밤이 와서 차갑게 식은 나를 삼키고 오래오래 뒤척일 것이다 속절없이 - 속절없다: 단념할 수밖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산간벽지: 산간 지대의 구석지고 후미진 산골(산간: 산과 산 사이에 산골짜기가 많은..

북리뷰/문학반 2022.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