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5

[연옥의 봄] 황동규 시집

황동규 2016 황동규 2016 p. 11 그믐밤 여행 도중 받은 아끼던 제자의 부음. 벌써 가는 나인가 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별이나 보자꾸나, 민박집 나와 언덕을 오를 때 휴대폰 전짓불이 나갔다. 냄새로 달맞이꽃 무리를 거쳐 반딧불이만 몇 날아다니는 관목 덤불을 지났다. 빛이 다가오는가 했더니 물소리였다. 불빛 낮춘 조그만 방같이 환(幻)한 여울을 건넜다.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별이 하나 떨어졌다. 걸음 멈추고 아는 별들이 제대로 있나 잊혀진 별자리까지 찾아보았다. 더 내려오는 별은 없었다. 땅으로 숨을 돌리자 풀벌레 하나가 마음 쏟아질까 가늘게 울고 있었다. 환(幻): 변할 '환' p. 16~17 살 것 같다 49일간 하늘이 이리 찌푸리고 저리 찌푸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미간(眉間)을 펴고 오..

북리뷰/문학반 2022.01.26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황동규 시집

황동규 2003 황동규 2003 p. 13 어떤 나무 다시는 세상에 출몰하지 않으려고 배에 돌을 달고 물 속에 뛰어든 사람 그 중엔 밧줄 풀어져 막 풀어진 눈으로 세상 구경 다시 한 사람도 있다. 안부 궁금하다. 한 오백 년 살며 몇 차례 큰 수술하고 사람 머리보다 더 큰 돌덩이 여럿 배에 넣고 넉넉하게 서 있던 나무 제주 애월에선가 만난 팽나무. 그 몸으로 어디 뛰어들어도 되떠올라 어리둥절할 일 없으리. 어느 날 돌덩이들만 땅에 내려 어리둥절하리. p. 14 쨍한 사랑노래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북리뷰/문학반 2022.01.19

황동규 [꽃의 고요], 황동규 시집

황동규 시집 2006 황동규 시집 2006 p. 17 연필화 눈이 오려다 말고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 옅은 안개 속에 침엽수들이 침묵하고 있다. 저수지 돌며 연필 흔적처럼 흐릿해지는 길 입구에서 바위들이 길을 비켜주고 있다. 뵈지는 않지만 길 속에 그대 체온 남아 있다. 공기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무언가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눈송이와 부딪쳐도 그대 상처입으리. p. 27 홀로움 시작이 있을 뿐 끝이 따로 없는 것을 꿈이라 불렀던가? 작은 강물 언제 바다에 닿았는지 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 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끝이 따로 없는.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p. 45 실어증은 침묵의 한 극치이니 아 이 빈자리! 자..

북리뷰/문학반 2022.01.15

황동규 [사는 기쁨]

황동규 2013 황동규 2013 p. 9 이별 없는 시대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 잘 가거라. 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 왜 힘들어 갈라지겠는가? 허허. p. 30~33 영원은 어디? 때아닌 추위 강습. 오리털 점퍼 끄집어내 덧입고 나선 산책길 길섶 누른 풀은 눈 맞고 얼어 풀떡 범벅되었고 아직 땅에 내려오지 못한 졸참나무 잎새들이 머리 위에서 쓰렁쓰렁 귀 시린 발성을 한다. 너는 지금 네 추위 속을 걷고 있어. 언덕을 넘자 서리 허옇..

북리뷰/문학반 2022.01.12

황동규 [오늘 하루만이라도]

황동규 2020 황동규 2020 황동규 시인의 열일곱 번째 시집 1938년생,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의 황순원 작가의 아들이다. 1958년, 19세에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로 등단했다. 60여 년 동안 시를 쓰고 있는 황동규 시인은 이번 시집이 마지막 시집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계속 시는 쓰겠지만, 그 시들은 유고시집에나 실리지 않겠냐며. 열렬한 팬으로... 앞으로도 많은 새로운 시집이 계속되기를... p. 16~17 오늘 하루만이라도 은행잎들이 날고 있다. 현관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또 하나의 가을이 가고 있군. 수리 중인 엘리베이터 옆 층계에 발 올려놓기 전 미리 진해지려는 호흡을 진정시킨다. 해 거르지 않고 한 번쯤 엘리베이터 수리하는 곳. 몇 번 세고도 또 잊어버리는 한 층 계단 수보다..

북리뷰/문학반 2022.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