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소설] 박이강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나에대한열정 2026. 5. 31. 16:50
반응형

교유서가 소설시리즈

박이강 소설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에는 9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흔들리는 것들」, 「오피스」, 「도시는 밤」, 「파라다이스 리조트」, 「방문객」, 「디디를 기다리며」, 「2백만 원어치 마음」, 「무탈」,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어느 작품이든 미니 드라마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재미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매여있고,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망설인다. 그러다가 마지만 단편,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에서는 앞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일단 한 발짝을 뗀다.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삶을 지탱하는 힘을 변화에 대한 저항이라 했던 앞의 인물들과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한다. 어쩌면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한발을 내딛는다는 것이 현실로 돌아가는 것일지, 현실을 넘어서는 것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곳을 향한 한 발의 내딛음은 인생에서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은유는 문장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삶을 바라보는 자세, 시선이기도 하다. 글 중에 권고사직을 끝난게임이라고 표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미 그렇게 명명했다면, 그 단어는 그 안에서의 의미로 끝난다. 그게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닐까. 너는 예전에는 안그랬다고, 나를 바라보면 너 자신에게 미안하지 않냐고 묻는 은유에게서, 지금 잘 살고 있냐는 질문을 받은듯 했다. 이대로 괜찮겠냐고 말이다. 묘한 위로와 자극을 받은 작품집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글입니다.)


p. 14
어쩌면 변화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지금의 삶을 지탱하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p. 28~29
아직은 여유가 없으니까 다음에, 아직은 괜찮으니까 다음에,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다음에, 그 지겨운 다음에, 아무리 간절히 바라도 부모님이 약속한 다음은 오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음으로 유보하는 방식으로 그들 역시 지금과는 다를 거라고 믿는 미래로 유보했다......나는 내일이 오늘과 다를 거라고 믿지 않았다. 그들처럼 모든 걸 다음으로 유보하는 대신, 다음을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같은 방식으로 나 자신에 대해서도 무심해지는 편을 택했다.


p. 82~83
지나온 자리에 흔적을 남긴다는 건 자신에 대한 무책임한 방임 같아. 물건을 남기는 것도, 누군가에게 기억될 말을 남기는 것도......다만 무방비 상태에서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스위치가 꺼지듯 생이 멈추어버릴까봐 그게 두려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남겨진 흔적들이 악취를 풍기며 낯선 이들의 시선 속에 방치되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거든. 내가 왜 강박적으로 방에 있는 짐들을 정리하는지 알겠지?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나는 집에만 오면 왜 이렇게 말이 많아지는지 모르겠어. 이 시간이 제일 편해서 그런가봐.


p. 228
어쩌면 잘 산다는 건 헛된 믿음을 헛되지 않다고 믿으며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p. 233
오늘 하루가 지났다.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오늘이 어제와 비슷했듯이 내일도 오늘과 비슷하겠지. 따지고 보면 거기서 거기인 날들일 뿐이다. 무탈해 보인다고 무탈한 건 아님을 모르지 않지만, 나는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 뿐이다. 삶이 무탈하기를 바라는 건 누군가의 순정한 얼굴만을 보길 기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임을 알고 있으면 된 것이다.


p. 243
하려다 말고, 하고 싶은데 못 하고, 못 하는 것도 아닌데 안하고 너 예전엔 안 그랬잖아.


p. 259
옛날의 너는 이렇게 한심하지 않았어. 너 자신이 더 잘 알잖아. 너는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어. 불편해지는 게 두려우니까 안 하는 것뿐이야. 늘 똑같은 고민을 하는 거, 버릇처럼 불평하는 거, 지겹지 않아?


p. 265
내 인생을 하나의 은유로 표혀한다면 뭐냐고 물었잖아.
아, 그게 뭔데?
발신인 불명 편지. 되돌려보낼 수가 없거든.



<황현경(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p. 269
아 소설들은 떠나왔거나 머물러온 이들의 이야기다 떠나온 이들은 다 돌아가고 싶고 머물러온 이들은 다 떠나고 싶어서, 머물다 떠났다 돌아오는 이야기라 해도 되겠다.요컨대 이 런 식, "그렇게 나는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늘 제자리를 맴돈다."(11쪽) 그런데 삶이 매양 그 꼴임은 우리도 알지만, 아니 알기에 더욱이 저 얘긴 좀 이상하게 들린다. 제자리로의 후진에 저리 익숙해 보인다는 것은 곧 전진도 어지간히 했다는 건데, 그러면 '왜 떠나나'하면서도 떠나고 또 떠났다는 것 아닌가. 그런 거라면 여행은 아무래도 선택의 문제는 아니지 싶다.

p. 272
......어느 쪽이건 그 내일이 끝나면 평소와 다름없이 '무탈'한 내일이 또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돌아오는 순간까지를 여행이라 부른다는 것을 상기하며, 이제 그 하루의 여정에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여보아도 좋겠다. 회귀를 반복하게 되는 그곳이 '제자리'임을, 그곳에서의 모습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 그 어떤 '다른 나'도 가능하지 않다면 오직 '지금의 나'만이 나일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여 '나'는 어김없이 이번에도 돌아오기 위해 떠나려는 참이다.









반응형
B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