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유서가 시집, 여섯번째.
추성은 《접시 위에는 잘 차려진 비밀이》
이 시집은 내게 마트료시카 같은 존재였다. 한달 가까이 책상위에 올려두고 같은 시를 반복해서 읽었다.
한번 읽고나서 이런건가 싶으면 다시 열었을 때 또다른 '의미'를 던진다. '질문'을 던진다는 표현이 더 가까운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무관한 말>에서는 AI와 인간에 대한 시인가, 인간다움이 무엇인가, 인간은 왜 전쟁을 일으키는가, 나는 정말 인간이 되고 싶은가, 세상에 정답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가...이런것들이 이 시에서 내가 발견한 마트료시카들이다. 아마 다음에 읽으면 난 또 다른 인형을 마주할지도 모르겠다.
<녹는 점>도 비슷했다. 자아에 대한 것인가, 몸에 대한 것인가, 죽음에 대한 것인가, 기억에 대한 것인가, 알 수 없음에 대한 것인가.
마트료시카의 제일 작은 인형을 찾아냈다고 해서 처음의 큰인형의 실존이 없어지는 게 아닌 것처럼, 이 시들을 읽어가며 들춰지는 생각들도 모두 각각의 의미로 존재한다는 것이 이 시집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시의 테두리에는, 겉으로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보이는데, 그 안을 열어보면 의심이 있고, 그 안을 열어보면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고, 그 안을 다시 열어보면 결국 사랑이 있다. 그렇지만 그 애정이 요란하지도 시끄럽지도 않다. 그리고 목적이나 방향도 없다. 그래서 좋았다. 나만의 층위들이 생길 수 있으니까.
<무관한 말>의
'되는대로 적기 그럴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
<녹는 점>의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는 대로 둘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라는 것도,
<유형> 의 '날개 대신 두 다리로 선 새들이 이윽고 나의 마음과 함께 방위없이 날아가기'
이 모든 것에 이미 정답이 아닌 끝없는 질문들이 느껴진다.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 잘 차려진 비밀도 그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교유단
출판사에서 책을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p. 27~28
<무관한 말>
문이 있다는 건 누군가 들어갔다 나올 수도 있고 들어갔다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고 그럴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언젠간 선생은 인공지능은 못 하고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을 쪽지에 적어서 내라고 했다. 나는 되는대로 적어서 내기로 했고
생각하기
꿈꾸기
마음 가지기
신 믿기
전쟁 일으키기
되는대로 적기
어느 전시의 인공지능 신 가이아는 사람처럼 되기를 학습받았고 이윽고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으나 결코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선생은 학생들이 쓴 쪽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꾸 칠판에 뭘 적었다. 먼 태초에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다고. 그리고 인간은 신이 되고 있어서 자꾸 한 차원 낮은 생명을 만들고 싶어한다고.
나는 마음도 있고 꿈도 꾸지만
전쟁을 일으키진 않고
신을 믿지도 않았다
나는 적극적으로 사람이 되고 싶지만
가끔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꾸 문안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거듭했다.내가 들어가지 않은 문안에서는 자꾸 폭탄이 터졌고 총성소리 같은 게 들렸다. 피를 흘리며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선생의 말이 자꾸 생각났다.
되는대로 적기
그럴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

p. 48
<녹는 점>
나인 것과, 나였던 것과, 내가 아닌 것 사이를 계단처럼 오르내리며 횡단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나. 진흙더미처럼 덩어리째로 쌓아올린 근육이 딱딱해지다가 서서히 흘러내립니다. 새하얀 뼈가 들숨날숨에 따라 움직이고, 나의 호흡은, 텅잉 그대로 살얼음의 모양을 내며 흩어집니다. 규칙적이지만 아주 희박합니다. 어느 신의 구부정한 척추와 엉덩이뼈를 깎아서 만들었다는 얼음 폭포, 눈앞을 막아서는 유령들도 한때 누군가의 입안에 놓인 숨결이었을 텐데. 돌출되었다가 움푹 들어가는 골짜기에는 누군가 죽은 모습 그대로 박제가 된 채 남아 있다는데. 손전등으로도 밝힐 수 없는 나의 어둠을 밝히는, 환한 밤이 있다는데.
나였던 것은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는 대로 둘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p. 106~107
<유형>
마침내
지도에 없는 길 따라 찾아 나선다 그곳에서는 내가 모르는, 아무도 모르고, 이제 막 잠 깨어난 돌 같은, 바람에 떨어지는 쓸쓸한 여름철 나뭇잎, 난해한 얼굴을
볼 수 있겠지
난맥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잎사귀 마음과 손금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손을 꽉 쥐었어, 유리 문진으로 깊게 밀어둔 지도에는 마음의 방위가, 우연히 들어본 노랫소리가, 찬찬찬
흘러나오기
내게는 꼭 네 개의 방향만 있다는 것처럼.
골목을 돌면, 그래서 마음 골목에 다다르면, 버스 정류장이 없고, 누구도 소포를 부치지 않는 우체통에, 버스에 올라탄 사람처럼, 무릎이 저려 양쪽으로 흔들흔들 빠져나가는 노랫말, 아는 사람만 안다는 가게가, 지도에는, 농담이 없어요 통화를 하면서 지나치는 여자가, 그리고 또다른 남자, 성별 모를 사람, 난해한 얼굴들 지나친다.
내가 갈 길이 점점 희박해지면, 누구 손 잡고 걸을 수도 없겠지 지도에는 적히지 않은 마음, 눈을 감으면 사라지는, 고작 몇 초 사이에 달라지는 풍경 눈 안에 담아두고 기억하면서도, 구불구불한 틈으로 빠져나가는, 날개 대신 두 다리로 선 새들이
이윽고 나의 마음과 함께
방위 없이 날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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