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류'를 사전에서 찾았다. 뜻을 모르지 않지만, 뭔가 놓치는게 있는듯 싶어서. "어떤 목적이나 방향을 잃고 헤맴. 또는 일정한 원칙이나 주관이 없이 이리저리 흔들림"
그리고 책표지를 다시 유심히 봤다. 표류소년. '년'의 글자가 비스듬히 삐뚤어져 있다. 편집의 의도인지 작가의 의도인지 모르겠으나, 이 책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소년은 표류하는듯 보이나 표류하지 않았다. 소년내부의 무언가에 균열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을 뿐.
죽은 엄마의 시신과 34일을 함께 한 14살 소년. 그에게는 과연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걸까.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고, 주위인물의 시선과 관점으로도 전개된다. 엄마의 죽음이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누구때문에 일어난 일인지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시대가 함께 앓고 있는 입시경쟁과 부모의 과욕, 교육의 문제, 사람들의 위선, 경찰과 검찰의 사건진행과정의 문제, 1타강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요한(소년)을 돌봐주던 예림이 엄마가 느꼈던 감정이나 행동이 조금은 당황스러웠는데, 책을 덮고 생각해보니 어쩌면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과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다. 책을 읽고 있을 때는 과하게 작동하는 이성이 책을 덮으면 현실의 나와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그나마 결말부분이 그래도 희망을 담고 있는듯하여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소년이 말하는 사랑이 아팠다. 독서모임하기에 좋은 책이다. 특히 부모의 입장에서는 할말이 너무도 많은 책이니까.


p. 95~96
요한은 비로소 깨달았다. 행복이라 하기에도 하찮은 일상이 삶을 얼마나 소중하게 만드는지를. 부모로부터 받았어야 마땅한 공감과 칭찬, 사랑의 결핍이 그의 삶을 얼마나 은밀히 갉아먹었는지를.
요한은 더는 좁은 다락방의 낯선 침대가 불편하지 않았다. 엄마의 부재가 슬프지도 않았다. 그는 엄마가 돌아오면 할 일을 생각했다. 사랑받는 착한 아들이 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에 엄마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 충격에 빠졌다. 엄마가 돌아오는 건 기쁘지만 엄마와 함께할 삶을 생걱허저 숨이 막혔다.



p. 161
근거가 있든 없든,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기대만으로도 지랄맞은 삶이 견딘 만해졌다. 누구도 화제에 올리지 않는 익명의 여자로 사는 건 산다고 할 수 없었다. 잊히는 것보다 욕을 얻어먹는 것이 낫고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보다 미움받는 것이 나았다.
p. 188
그는 괜찮지 않았다. 한순간도 괜찮았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누가 물으면 괜찮다고 대답했다. 수임 아줌마가 배고프지 않냐고 물어도 괜찮다고, 엄마가 피곤하냐고 물어도, 선생님이 어려운 일 없냐고 물어도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그러나 괜찮지 않을 거란 전제가 포함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었다.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괜찮아질 희망이 없으면 괜찮은 척 자신을 속일 수밖에 없다는 걸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배웠다. 자신을 속일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을 속일 수도 있다는 걸.
p. 218
"이렇게 미친 듯이 잡아들이는데 왜 범죄자들이 스멀스멀 끝도 없이 기어 나오죠?"
"인간만이 범죄를 저지르고 처벌하기 때문이지. 종을 잇기 위한 살육이 매일 벌어지는 사바나에서 사자가 하이에나를 죽였다고 처벌받거나 비난받지는 않잖아? 하지만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연의 악 때문에 누군가를 해치지."
"아뇨.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는 건 사악해서가 아니라 연약하기 때문이에요. 폭력에 탐닉하거나 타인을 증오하거나 파괴적이어서가 아니라 남에게 속기 쉽고 유혹을 이기기 어렵고 쉽게 두려워하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요. 연약함이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거예요."
p. 246
"예전엔 사람들이 부끄러움이라는 걸 알았어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던 시절도 있었고요. 요즘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는 행위를 부끄러워하죠. 자신의 삶에 당당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건 당당함이 아니라 뻔뻔함 아닐까요?"
p. 257~258
"완벽한 진실은 있어도 완벽한 거짓말은 없어. 거짓말을 한 자신이 그걸 알기 때문이지."
'북리뷰 > 문학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알렉스 핀레이 《마지막 모든 두려움》 (0) | 2026.06.06 |
|---|---|
| [교유서가 시집] 김박은경 《의심하세요》 (0) | 2026.05.31 |
| [소설] 박이강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0) | 2026.05.31 |
| [교유서가 시집] 추성은 《접시 위에는 잘 차려진 비밀이》 (0) | 2026.05.30 |
| 이우 《야생의 사고》 (0) | 2026.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