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책] 이병률 시집 <바람의 사생활>

나에대한열정 2021. 12. 10. 22:33
반응형

이병률 시집 <바람의 사생활>

 

 

p. 12~13

나비의 겨울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화초에 물이 흥건하고 밥 지은 냄새 생생하다
사흘 동안 동해 태백 갔다가
제천 들러 이틀 더 있다 왔는데
누군가 내 집에 다녀갔다

누군가 내 집에 있다 갔다
나는 허락한 적 없는데 누군가는 내 집에 들어와
허기를 채우고 화초를 안쓰러워하다 갔다

누군가는 내 집에 살다 갔는데
나는 집이 싫어 오래 한데로 떠돌았다
여기서 죽을까 살을까 여러 번 기웃거렸다

누군가 다녀간 온기로 보아
어쩌면 둘이거나 셋이었을지도 모를 정겨운 흔적 역력하고
문이 그대로 잠긴 걸 보면
한번 왔다가 한번 갈 줄도 아는 이 분명하다

누군가 내 집에 불을 놓았다
누군가 내 집에서 불을 끄고 아닌 척 그 자리에 다시 얼음을 놓았다
누군가 빈집에서 머리를 풀어 초를 켜고 문고리에 얼굴을 기댔다

 

 

 

p. 18~19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종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
나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
한때는 돌을 잘 다루는 이 되고도 싶었는데
이젠 다 집어치우고

아주 넓은 등 하나를 가져
달(月)도 착란도 내려놓고 기대 봤으면

아주 넓고 얼얼한 등이 있어
가끔은 사원처럼 뒤돌아봐도 되겠다 싶은데

오래 올 양으로 강물 다 흘려보내고
손도 바람에 씻어 말리고

내 넓은 등짝에 얼굴을 묻고
한 삼백 년 등이 다 닳도록 얼굴을 묻고

종이를 잊고
나무도 돌도 잊고
아주 넓은 등에 기대
한 시절 사람으로 태어나
한 사람에게 스민 전부를 잊을 수 있으면

 

 

 

p. 30~31



나에게 쉰이 넘은 형이 하나 있다
그가 사촌인지 육촌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모른다

태백 어디쯤에서, 봉화 어디쯤에서 돌아갈 차비가 없다며
돈을 부치라고 하면 나에게 돌아오지도 않을 형에게
삼만원도 부치고 오만원도 부친다

돌아와서도 나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는 형에게
또 아주 먼 곳에서 돈이 떨어졌다며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는 그가 관계인지 높이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잘 모른다

단지 그가 더 멀리 먼 곳으로 갔으면 하고 바랄 뿐
그래서 오만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고
십만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며
그의 갈라진 말소리에 대답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어느 먼 바닷가에서 행려병자 되어 있다고
누군가 연락해왔을 땐 그의 낡은 지갑 속에
내 전화번호 적힌 오래된 종이가 있더라는 것
종이 뒤에는 내게서 받은 돈과 날짜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더라는 것

어수룩하게 그를 데리러 가는 나는 도착하지도 않아
그에게 종아리이거나 두툼한 옷이거나
그도 아니면 겹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할 뿐
어디 더 더 먼 곳에서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했으면 하고
자꾸 바라고 또 바랄 뿐

 

 

 

p. 36~37

사랑의 역사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친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쳤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곧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p. 38~39

외면

받을 돈이 있다는 친구를 따라 기차를 탔다 눈이 내려 철길은 지워지고 없었다

친구가 순댓국집으로 들어간 사이 아는 밖에서 눈은 맞았다 무슨 돈이기에 문산까지 받으러 와야 했냐고 묻는 것도 잊었다

친구는 돈이 없다는 사람에게 큰소리를 치는 것 같았다 소주나 한잔하고 가자며 친구는 안으로 들어오라 했다

몸이 불편한 사내와 몸이 더 불편한 아내가 차려준 밥상을 받으며 불쑥 친구는 그들에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그들은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고 친구는 그러니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언 반찬 그릇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흘끔흘끔 부부를 훔쳐볼수록 한기가 몰려와 나는 몸을 돌려 눈 내리는 삼거리 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맞은 사람들은 까칠해 보였으며 헐어 보였다

받지 않겠다는 돈을 한사코 식탁 위에 올려놓고 친구와 그 집을 나섰다 눈 내리는 한적한 길에 서서 나란히 오줌을 누며 애써 먼 곳을 보려 했지만 먼 곳은 보이지 않았다

요란한 눈발 속에서 홍시만한 붉은 무게가 그의 가슴에도 맺혔는지 묻고 싶었다

 

 

 

p. 50~51

절벽 갈래 바다 갈래

절벽 갈래 바다 갈래
옆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한 무리의 사람들 속에서 들리는 말
나는 속으로 대답한다
둘 다 갈래

알고 보니 절벽이라는 이름의 술집이란다
술집 이름이 바다란다
어둠을 대상으로 술을 마셔야 할 사람들은
절벽이란 말이 바다라는 말이 신(神)의 이름 같다

절벽 혹은 바다는 사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디에나 있어도 무방하다
절벽 가자 하는 것은 절벽 끝에 서서 일렁이자는 것이 아니고
바다 가자 하는 것은 바다에 몸 담그러 가자는 말이 아닐진대

한밤에 그 말을 들으며 몸을 세우고 마는 당신 혹은 나
늦은 시간 묵묵히 그곳을 향하여 패를 던지자는 것이다

당김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절벽 혹은 바다로 가서 저 허공으로 던져진 당신 혹은 나를
발버둥치는 몸짓을 낚아채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저 먼 곳 어둠 속 허공 어딘가로부터
여린 기타 소리 같은 가닥이 잡혀와서
그 멀리에 딱딱한 잡을 것이 있으리라는 가정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절벽 혹은 바다란 말은 그리하여 한밤중에 독으로 피거나
혹은 꽃으로 피어나 물들이는 것이다
흘러가는 것이다

 

 

 

p. 52~53

파도

축구를 응원하러 대인파가 모인 시청 앞 광장
보기에도 충분히 허름한 부부가
군중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아내로 보이는 여자는 실명한 듯 한쪽 눈이 패었고
아내의 꿰맨 가방을 메고는 앞서 느리게 걷는 남자는
야윈 몸이 작아도 너무 작아 바스라질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바깥을 서성이다 못해 밀리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눈을 떼기 싫었던 건
나란히 붉은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였다
그때 사내가 몸을 돌려 아내에게 뭐라 귀엣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때 중심에서 출렁 함성이 터지는 바람에 아내는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들었다

섬에 가자고 했다 잘못 들었다 집에 가자고 했다
생활이 말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아니 생활을 넘지 못해 미안하다
앉자고 했다 잘못 들었다 웃자고 했다
바다를 건너자 했다 다리를 건너자고 들었다
그래도 살자고 했다 아니 삼키자고 했던가
고래처럼 모인 마음들이 파도처럼 잘못 왔다가 되돌아가는
개 같은 밤

 

 

 

p. 62~63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빈집으로 들어갈 구실은 없고 바람은 차가워 여관에 갔다
마음이 자욱하여 셔츠를 빨아 널었더니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눈물 같은 밤
그 늦은 시각 여관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옆방에 머물고 있는 사내라고 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왜 그러느냐 물었다
말이 하고 싶어서요 뭘 기다리느라 혼자 열흘 남짓 여관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쓸쓸하고 적적하다고

뭐가 뭔지 몰라서도 아니고 두려워서도 아닌데 사내의 방에 가지 않았다
간다 하고 가지 않았다

뭔가를 기다리기는 마찬가지, 
그가 뭘 기다리는지 들어버려서 내가 무얼 기다리는지 말해버리면
바깥에서 뒹굴고 있을 나뭇잎들조차 구실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셔츠 끝단을 타고 떨어지는 물소리를 다 듣고 겨우 누웠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
온다 하고 오지 않는 것들이 보낸 환청이라 생각하였지만
끌어다 덮는 이불 속이 춥고 복잡하였다

 

 

 

※ 이병률 시인의 다른 시집

 

2021.12.09 - [북리뷰/문학반] - [책] 이병률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책] 이병률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병률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p. 58~59 호수 호수 위 작은 배 하나 마주 앉아 기도를 마치고 부둥켜안는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끌어안았던 팔을 풀자 한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배는 흔들리고

change-me-first.tistory.com

반응형
B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