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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최영미 시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나에대한열정 2021. 12. 15.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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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94년도에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보면서, '시'라는 존재가 멋있을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처음 했었다. 같은 책을 열 권이 넘게 산 것도 내게는 유일할 것이다. 좋아하는 친구들에게는 한 권씩 권냈으니. 마치 내가 쓰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손때 묻은 초판본은 어디로 간 건지. 개정판을 또다시 사서 본다.

 

최영미 시인의 표현대로 투명한 것이 나를 취하게 하던 그런 시기에, 난 그녀의 시들이 너무 좋았다. 세월이 흘러도, 계속 보아도, 좋은 걸 보니, 그때의 내 안목도 나쁘지 않았나보다. 아니면 시들이 너무나 내 스타일이든지.

생각 같아서는, 마음 같아서는 모조리 다 옮겨 써놓고 싶다. 그러면 안 되겠지. 차라리 시집을 다시 돌릴까.

 

 

p. 10~11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p. 14~16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 귀퉁이는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여러 번 곱씹은 치욕,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
자위 끝의 허망한 한 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상처가 치통처럼, 코딱지처럼 몸에 붙어 있다고
아예 벗어부치고 보여줘야 하나
아아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 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p. 24~25

먼저, 그것이

고개 숙이며 온다
아스팔트를 데웠다 식히는 힘으로
장롱문이 소리 없이 닫히는 힘으로
초조한 이마 위 송송한 구슬땀 몇 개로
사랑은 온다

첫번째 사과의 서로운 이빨 자국으로
초승달 둘레를 둥글게 베어내며
뚱뚱한 초 하나로 밤이 완성될 때

보채는 아이의 투정처럼
식은 차 한잔의 위로처럼
피곤을 넘어 반성을 넘어
어쩌면 사랑은 온다

망설이는 마음 한복판으로
어제의 사랑을 지우며
더듬거리며 오늘, 사랑이 내게로 온다
주저하는 나보다 먼저, 그것이 내게로 온다

 

 

p. 28~29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p. 34~35

혼자라는 건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끝내는 것만큼 힘든 노동이지

고개 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넘기는 법을
소리를 내면 안돼
수저를 떨어뜨려도 안돼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해
체하지 않으려면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

 

 

p. 46~47

사는 이유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p. 50~51

돌려다오

언제부터인가
너를 의식하면서 나는 문장을 꾸미기 시작했다
피 묻은 보도블록이 흑백으로 편집돼 아침 밥상에
올랐다, 라고 일기장에 씌어 있다

푸른 하늘은 그냥 푸른 게 아니고
진달래는 그냥 붉은 게 아니고
풀이 눕는 데도 순서가 있어
강물도 생각하며 흐르고
시를 쓸 때도 힘을 줘서
말이 말을 부리고

나의 봄은
그렇게 가난한 비유가 아니었다

하늘, 꽃, 바람, 풀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던 구름......
어우러진 봄은 하나의 푸짐한 장난감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마음대로 바라보며 갖고 놀면
어느새 하루가 뚝뚝 가버려
배고픈 것도 잊었다
가난은 상처가 되지 않고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던
어리고 싱겁던

나의 봄을 돌려다오
원래 내 것이었던
원래 자연이었던

 

 

p. 57

폭풍주의보

천지간 어디,
삼십년 고이 썩힌 울음 받아줄 품 있을까마는
쫓고 쫓기어 늙은 여관방
오르내리 치대는 하룻밤 흥정처럼
창밖으론 바다가 수다스럽게 끓어오르고
하늘도 물도 검게 풀려
희망과 절망처럼 쉽게 서로 넘나드니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밤안개 피어 도져도
지평선을 묻지는 않기로 했다
고통은 고통끼리 정붙여
살 맞대고 물어뜯는 밤.
치욕은 또 다른 치욕으로 씻기느니
아무것도 그냥은 사라지지 않는다
폭풍주의보에 묶인 겨울, 땅끝 마을에서도

 

 

p. 101

한 남자를 잊는다는 건

잡념처럼 아무데서나 돋아나는
그 얼굴을 밟는다는 건
웃고 떠들고 마시며 한 남자를 보낸다는 건
뚜 뚜 가슴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전화기를 내려놓는다는 건
편지지의 갈피가 해질 때까지 한 시절을 접는다는 건
비 갠 하늘에 물감 번지듯 피어나는 구름을 보며
한때의 소나기를 잊는다는 건
낯익은 골목, 등 너머로 덮쳐오는
그림자를 지운다는 건
한 세계를 버리고 또 한 세계에 몸을 맡기기 전에
초조해진다는 건
논리를 넘어 시를 넘어 한 남자를 잊는다는 건
잡념처럼 아무데서나 돋아나는
그 얼굴을 뭉갠다는 건

 

 

p. 108~109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재미없는 소설책을 밤늦도록 붙잡고 있는 건
비 그친 뒤에도 우산을 접지 못하는 건
짐을 쌌다 풀었다 옷만 갈아입는 건
어제의 시를 고쳐 쓰게 하는 건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어
돌아누워도 엎드려도
머리를 헝클어도 묶어보아도

새침 떨어볼까요 청승 부려볼까요
처맨 손 어디 둘 곳 몰라
찻잔을 쥘까요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을까요
은근히 내리깔까요 슬쩍 훔쳐볼까요
둘쑥날쑥 끓는 속 어디 맬 곳 몰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슴속 뒤져보면
어딘가 남아 있을, 잡초 우거진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에 그대, 들어오겠나요
어느날 문득 소나기 밑을 젖어보겠나요

잘 달인 추억 한술
취해서 꾸벅이는 밤
너에게로, 너의 정지된 어깨 너머로
잠수해 들어가고픈

비라도 내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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