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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p. 58~59
호수
호수 위 작은 배 하나
마주 앉아 기도를 마치고
부둥켜안는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끌어안았던 팔을 풀자
한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배는 흔들리고
다른 한 사람도 놀라 일어나자
위태롭게 다시 배가 휘청였습니다
먼저 일어난 한 사람이 물로 뛰어들더니
헤엄을 쳐서 배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멍이 드는 관계가 있습니다
멍이 나가는 관계가 있습니다
저기 보이는 저 첫 별은
잠시 후면 이 호수에 당도해
홀로 남은 채로 멍이 퍼지고 있는 한 사람을 끌어줄 것
입니다
호수 위에 작은 배 하나
고요밖에는 아무 일도 없는데
푸드덕 물새가 날아오릅니다
아무 일도 없는데 꽃이 피고 피는 건
꽃도 어쩌지 못해서랍니다
p. 60~61
새
자면서 누구나
하루에 몇 번을 뒤척입니다
내가 뒤척일 적마다
누군가는 내 뒤척이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지구의 저 가장 안쪽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자면서 여러 번 뒤척일 일이 생겼습니다
자다가도 가슴에서 자꾸 새가 푸드덕거리는 바람에
가슴팍이 벌어지는 것 같아
벌떡 일어나 앉아야 죽지를 않겠습니다
어제는 오늘은 맨밥을 먹는데 입이 썼습니다
흐르는 것에 이유가 없고
스미는 것에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나는 생겨먹었습니다
신(神)에게도 신이 있다면 그 신에게 묻겠습니다
지구도 새로 하여금 뒤척입니까
자다가도 몇 번을
당신을 생각해야
이 마음에서 놓여날 수 있습니까
p. 84~85
무엇을 제일로
제일로
가장 무엇 하나만을 남겨 가질것인가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후라면 말이다
누구는 그 사람의 다정함이라 하고
누구는 목소리일 것이라 하지만
미련스러이 나는 그것이 꼭 하나여야만 하느냐고 묻는다
나에게 그것은 당신 손바닥일 수 있으며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가려 만들어주던 그늘일 수도 있으며
그 그늘 아래로 무참히 찾아온 졸음의 입자일 수도 있겠지만
모두가 망하고 멸하고 난 후에라도 살아 있을
제대로 된 절망 하나를 차지하고
놓지 않겠노라 대답해야겠는데
도저히 뺄 것 하나 없는
그 사람의 무엇 하나만을
어떻게 옹색하게 바란단 말인가
p. 104~105
이 넉넉한 쓸쓸함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p. 106~107
직면
주차장에서 나오려고 차를 조금 움직이다가
차 한 대가 들어오는 바람에 차를 다시 원위치로 후진한다
그게 얼마가 되었건
하필이면 헤어진 사람의 차
내려서 제 갈 길을 가겠지 싶은데
내 차를 알아봤는지 내리지를 않는 사람
이번에도 뒷모습을 보일까 싶어 나 또한 움직일 수 없다
맨 처음 당신을 본 어느 돌연하고도 뜻밖인 날
한사코 당신을 다시 보겠다고
그 자리에 할 말을 두고 온 적 있었는데
같이 올려다봤던 하늘은 없고
이제는 각자 다른 네모 칸에서 옆 칸의 기척이나 살피며
질식할 것 같은 지하에 함께 갇혀 있다는 사실도 어쩌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밀물과 썰물이 뒤섞이고 교차하는
평범한 순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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