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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 그만 쓰자 끝.

나에대한열정 2021. 12. 27.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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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이 책은 1989년 출간되었던 첫 판본(1976년부터 1989년까지의 기록)에, 1995년부터 2013년까지의 기록을 추가하여 2021 올해 다시 출간된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이다. 

 

책에는 옮겨 적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일부만 옮기면 글이 깨져서 의미가 없는. 

 

만약 글을 쓴다면 쓸 수 있다면, 이분처럼 이렇게 쓰고 싶다. 

 

p. 14~15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 중에서.

때로 한 10년쯤 누워 있고만 싶어질 때가 있다. 모든 생각도 보류하고 쉽게 꿈꾸는 죄도 벗어버리고 깊이깊이 한 시대를 잠들었으면.
그러나 언젠가 깨어나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의 황량함, 아아 너무 늦게 깨어났구나 하는 막심한 후회감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결국 그 거대한 타의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인간답게 죽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대항해서 싸우는 필사의 길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밤에도 나는 이를 갈며 일어나 앉는다. 끝없이 던져지고 밀쳐지면서 다시 떠나야 하는 역마살의 청춘 속에서, 모든 것이 억울하고 헛되다는 생각의 끝에서, 내가 깨닫는 이 쓸쓸함의 고질적인 힘으로, 허무의 가장 독한 힘으로 일어나 앉는다.

싸움에의 그 무슨 고독한 의지가 나를 키워주는지, 살려주고 죽여주는지, 그것을 따라 다시 나는 젊음이라는 열차를 타려 한다. 내가 잠시 쓸쓸해져서 슬며시 내려버렸던 그 열차를. 인생의 궤도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싸워가면서 사는 법, 살아야 하는 법을 철저히 배우기 위해, 공부하듯이......(1976)

 

 

p. 20
인간은 즐거움을 먼저 발견했을까. 아니면 괴로움을 먼저 발견했을까?

 

 

p. 22~23
<산다는 이 일> 중에서

말하자면 나는 애초에 내 인생을 눈치챘다. 그래서 사람들이 희망을 떠들어댈 때에도 나는 믿지 않았다.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언제나 확실한 절망을 택했다. 그러나 애초에 나는 내가 백조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운 오리 새끼라고 손가락질할 때에도 나는 속으로 코웃음만 친다. 그리고 잡균 섞인 절망보다는 언제나 순도 높은 희망을 산다. 생각해보면, 우우, 지겹고 지겹다. 눈 가리고 절망하기, 눈 가리고 희망하기, 아옹! 아옹!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괴로운 기억들과 즐거운 방법적 꿈 사이를, 눈 가린 절망과 눈 가린 희망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그럼 어떠냐, 뻗을 대로 뻗어라. 어차피 한판 놀러 나왔으니까. 신명 풀리는 대로 놀 수밖에. 신명 안 풀리면 안 놀 수밖에.(1981)

 

 

p. 32~34
<도덕하는 사람들> 중에서

한편으론, 도덕이란 게 물론 한 집단의 대다수가 되도록 행복하게, 되도록 탈없이 살아가기 위하여 하나의 정신적 규범으로서 의지해야 할 바이긴 하지만 그 싹은 여전히 개인의식의 혹은 개인 양식의 계보 속에서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결국 한 가치는 인간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 정당하게 그리고 정직하고 재고 평가함으로써(평가하지 않는 한 가치는 태어날 수 없다)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자신이 살아온 것에 비추어 자신이 살아가야 할 바의 지표를 정하기 위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가치는 선험적으로 혹은 만고불변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삶에 대한 평가 작업에 의해서 '태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는 우리의 평가 활동이 방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 어떤 일에 기존 도덕률의 이름으로 성급하게 유죄를 선고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결국 무엇이 도덕적인가, 무엇이 비도덕적인가 하는 물음의 '무엇이'는 삶이 정당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요구하는 바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의 행동에 서로 모순한 판단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가치관의 차이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는, 기존 도덕률에 의해 유죄 선고된 새로운 가치관을 몸소 행복하게 실현함으로써 그 가치관의 옳음을 보여주거나 혹은 기존 도덕률의 응징에 따라 스스로 철저하게 파멸함으로써 그 기존 도덕률이 썩어 있음을 보여줄 수도 있으리라. (1982)

 

 

p.52~53
<죽음에 대하여> 중에서

내가 그리고 오랫동안 죽음에 환상과 기대를 품어왔던 것은 내가 나의 삶에서 충분한 만족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나는 실제의 한 죽음을 통해, 죽음은 아무런 행복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죽음은 다만 한 문제 자체를 도중에 종결시켜버릴 뿐이며, 더 나아가 그 문제엔 해답이 없을지도 모르며, 더 더 나아가 아마도 그런 문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이전엔 죽음이란 내게 막연하게나마 어떤 관능과 연결된 것이었다. 집요한 불면 끝에 어느새 가볍고 감미롭게 찾아드는 달콤한 잠처럼, 혹은 보다 적극적으로 고통의 절정에서 느끼는 쾌락처럼, 죽음은 깊고 짙고 강렬하며 무르익은 관능과 연결된 것이었다. 죽음은 언제나 유혹처럼 감미롭게 찾아드는 '다른 손길'이었다. 그러나 죽음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내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 느꼈다. 그것은 현실적이고 비참하며, 피할 수만 있다면 온 힘을 다해 도망가버리고만 싶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또한 죽음은 내가 생각하듯 한순간의 뛰어오를 듯한 슬픈 희열 혹은 고통의 쾌락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길고 지루한,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행사 같은 것이었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고 곱씹어보고 그러고서 때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치러내야만 하는 의무적인 행사였다.

그러나 내 죽음의 관념은, 어머니의 실제의 죽음을 통해 죽임을 당했다. 그리하여 비로소 나는 그래도 내가 살아야 할 이유와 명분, 그리고 살아야겠다는 본능을 되찾은 것 같다.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고 간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갖고 있었던 죽음의 관념 혹은 죽음의 감각은 산산이 깨뜨려 나로 하여금 이 일회적인 삶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끔 해주고, 그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잘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용기와 각오를 갖게 해 준 것이리라.

 

 

p. 58~59
<떠나면서 되돌아오면서> 중에서

아닌 게 아니라 때로는, 산다는 게 지저분한 오물들을 입안에 잔뜩 처넣고 있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이 입안에서 그 오물이 자꾸만 커져가는 듯하고, 그러한 느낌 그러한 의식 자체가 우리의 숨통을 짓눌러오는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퍼질러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일단은 떠나야 한다는,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떠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자기 자신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끝과 시작처럼 떠난다는 것과 되돌아온다는 것은 하나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무수히 떠나고 무수히 되돌아오면서 많은 시간을, 그것도 대부분 괴로움과 불행의 시간을 바침으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어쩌면, 행복이란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불행이 없는 것이 행복이라는, 조금은 쓴, 그러나 넉넉한 인식뿐일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인간은 상처투성이의 삶을 통해 상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모순의 별 아래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상처 없는 삶과 상처투성이의 삶, 꿈과 상처,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일상을 더욱 굳건하게 받쳐주는 원리, 한 몸뚱이에 두 개의 얼굴이 달린 야누스의 원리이다.

 

 

p. 60
그리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 결국,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발음해야만 한다'.(1984)

 

 

p. 78
'문을 찾을 수 있어 그 앞에서 울 수 있는 자는 아직 행복하여라. (기유빅)' (1985)

 

 

p. 169~171
수피즘 이야기 중에 이런 게 하나 있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어떤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물은 모여 모여, 흘러 흘러 마지막으로 바라도 흘러들지. 그러나 이 물이 하는 숱한 여행 중에서 언젠가 한 번은 사막을 건너가는 여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와. 온 세상을 돌고 돌아 흐르다 마침내 사막 앞에 다다른 물은 절망하지. 달구어진 거대한 모래사막을 앞에 두고서 물은 공포에 떨어. 물이 사막을 건널 수는 없으니까. 도중에 물은 깊은 모래 속으로 빨려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까. 그때 사막이 물에게 말하지. 선택하라.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를. 물은 물론 살고 싶다고 말하지. 그러자 사막은 그러면 공기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라고 말해. 하지만 물이라는 육체의 아이덴티티밖에 알지 못하는 물에게는 그 물(육체) 형태를 잃는다는 것 자체가 죽음이야. 그래서 물은 더욱 공포스러워하지. 그때 허공의 보이지 않는 바람이 물에게 속삭여. "우리와 함께하라. 우리는 수도 없이 이 일을 해왔다. 우리가 공기가 된 너를 실어 날라 그 산으로 데려다 주마. 그러면 너는 거기서부터 다시 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물(육체)이라는 형태를 생명으로 알았던 물은 자기 죽음 앞에서 선택하지 못하고 떨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순간은 오고, 그리하여 그 물 중의 어떤 부분은 증발해 바람에 실려갔고, 다른 어떤 부분은 사막의 모래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 그때 공기로 변하는 쪽을 택했던 물은 비로소 그것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그리고 모래 속으로 자취 없이 사라져 죽음을 맞이했던 다른 부분은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죽어 떨어져 나가야 했던 부분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거야. 아마 우리 인간들의 삶도 그럴지 몰라. 언젠가는 그렇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오고,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오는 인생이 겉으로는 무시무시하고 불행해 보일지 모르지만, 일단 그 과정을 거친 뒤에는 그것이 오히려 축복이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르지. (1998)

 

2021 증보개정판에서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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