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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일은 잘 없는데, 유일하게 두 번 정주행한 우리나라 드라마가 있다. 바로 <이번 생은 처음이라>라는 드라마이다. 캐릭터와 잘 맞는 캐스팅, 그리고 엮어 내는 과정, 중간중간 작가가 전하고 싶어 하는 말들이 무언가 좋았다. 물론 어색하거나 쌩뚱맞은 부분이 어느 정도 있는 장면들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눈감아줄 만했다.
(정주행이라는 의미를 잠시 언급하고 가자면, 사전적으로는 연재되는 글이나 만화 또는 드라마나 영화의 시리즈물 따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나는 정주행레이서에 속한다. 정주행 레이서는 시리즈물을 1편부터 마지막 편까지 몰아보는 '정주행'과 경주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레이서'의 합성어로, 일정한 주기로 연재될 때마다 보는 것이 아니라, 시리즈를 통째로 몰아보는 콘텐츠 소비자를 의미한다.)
드라마 <이번생은 처음이라>에서는 몇 권의 책이 등장하는데, 그중의 한 권이 바로 박준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다.
P. 11
그늘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P. 19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 중에서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꼭 나처럼 습관적으로 타인의 말을 기억해두는 버릇이 없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P. 27
그해 여수
그해 밤 별빛은
우리가 있던 자리를 밝힐 수는 없었지만
서로의 눈으로 들어와 빛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P. 32
비
그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나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너는 다만 슬프다고 했다.
P. 50~51
<고독과 외로움> 중에서
독선의 끝에는 더욱 날 선 독선이 기다리고 있음을 목격한다. "나는 시간 속에 정착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영원을 향해 몸을 돌려보았다. 발을 딛고 설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라는 에밀 시오랑의 문장을 종종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렇게 며칠 동안 고립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제야 내가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고 무겁게만 여겨졌던 내 인연들의 귀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맑은 눈빛을 다시 보고 싶어 한다.
몇 해 전 좋아하는 선배 시인과 차를 마시면서 이런 나의 괴팍한 습관을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 선배는 자신도 나와 비슷한 버릇이 있다고 반가워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다 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P. 53
여행과 생활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이
나에게는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당신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함께하지 못할 앞으로의 먼 시간은
당신에게 여행 같은 것으로 남고
나에게는 생활 같은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P. 63
<낮술> 중에서
독주를 각자 한 병씩 비워갈 무렵,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선생님이 말을 시작했다.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 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하지 않게 돼."
선생님의 이 말은 당시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을 물론이고 이후에도 삶의 장면 장면마다 불러내는 말이 되었다. 비 오는 오후의 술 생각처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 혹은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의 냉수처럼 간절한 말.
P. 64~65
<마음의 폐허> 중에서
어디 타인뿐이었던가. 삶의 순간마다 나는 스스로에게조차 마음을 내어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믿으면 믿는 만큼 상처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여전히 나에게 '믿음'은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들 중에 가장 추상적이고 아득한 것으로 다가온다. 이 추상과 아득함은 내가 지금 믿고 있는 상대가 배신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함보다는, '믿음'이라는 나의 감정이 언젠가는 닳고 지쳐 색이 바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서 온다.
P. 70
울음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흐르고 흘러가다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P. 83
답서
내일 아침빛이 들면
나에게 있어 가장 연한 것들을
당신에게 내어보일 것입니다.
한참 보고 나서
잘 접어두었다가도
자꾸만 다시 펴보게 되는
마음이 여럿이었으면 합니다.
P. 93
<사랑의 시대> '실체' 중에서
상대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나에게 유일해지고 싶은 감정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면 부를 방법이 없다.
P. 110
<일상의 공간, 여행의 시간> 중에서
일상의 공간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주고 여행의 시간은 그간 우리가 지나온 익숙함들을 가장 눈부신 것으로 되돌려놓는다.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P. 188
해
새로운 시대란 오래된 달력을 넘길 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보는 혹은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서로의 눈동자에서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준 산문집 <계절 산문> (2021)
P. 15
시작
'시작'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마음속에 문이 하나 새로
생기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이 문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문고리 밑에
'당기시오'라는 글자가 작게 적혀 있을 테고요
시작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나에게 그동안 익숙했던 시간과 공간을
얼마쯤 비우고 내어주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밖으로 열리는 문이 아닌
늘 안으로만 열리는 문
시작이라는 문
P. 41
<삼월의 편지> 중에서
사는 일이 이상합니다. 마음에 저승 같은 불길이 일고, 그것을 손으로 비벼 끄다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어느새 말과 행동까지 뜨거워져서는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하루하루를 이렇게 보냅니다. 그러다 다시 지금 같은 깊은 밤이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마음의 빈 들판을 봅니다. 제게 주어진 밤이라는 시간을, 낮 동안 일어난 불길을 덮는 데에 온전히 쓰는 기분입니다.
P. 101
정의
사랑은 이 세상에
나만큼 복잡한 사람이
그리고 나만큼 귀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새로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P. 156~157
<크게 들이쉬었다가 이내 기침이 터져나오는 겨울밤의 찬 공기처럼> 중에서
덮어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고 네가 다시 그 말을 어떤 식으로 받아쳤으며 그사이 숨어 있는 잘못의 세목들. 이런 것들을 들추어 밝히는 대신 그냥 덮어두는 편이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또 덮어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마지막과 그 사람의 마지막을 같이 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중간에서 그 사람의 마지막을 보거나 아니면 그가 중간쯤 왔을 때 나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덮어둔다는 것은 어느 낮은 시간을 그냥 흐르게 하는 것이고, 그곳으로 흘러온 것들을 마다하지 않고 반긴다는 뜻이며 한참 세상이 지나 그 위에 무엇이 쌓였다 해도 변함없는 것들을 다시 찾아내는 일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과 함께, <이번 생은 처음이라>라는 드라마에 나왔던 책들
2021.07.06 - [북리뷰/문학반] - 온전히 혼자가 된다는 것. 도리스 레싱 단편선 <19호실로 가다>
정현종의 <섬>이라는 시집도 나왔으나, 이건 포스팅을 하지 않아, 그 시가 적혀 있는 포스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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