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신용목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나에대한열정 2022. 1. 3.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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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2021

 

 

신용목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2021

 

 

 

 

신용목 시인,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용목 시인(1974년생, 경남 거창)은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작품으로는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 <나의 끝 거창> 산문집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소설 <재>(2021) 등이 있다.

 

 

p. 25
대부분의 나

하루의 망치로 쾅쾅 나는 박아 넣으면 까맣게 바닥에 남을 한 점의 머리

비행기가 지나가면 하늘이 길게 잘려서 어둠 한끝이 돌돌 말려 올라간다
지붕 위에 비스듬히 누워, 먼 별빛을 보던 바람이 갑자기 머리를 긁적이며,
방금 뭐가 지나간 것 같은데······

악몽이 잠의 창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내 속의 아이들을 부른다, 밥 먹고 울어야지

턱밑에 장도리를 걸고 머리를 뽑아올리면
나는 한참을 두리번거린다

인생이 잠시 들려 사랑을 주고 젊음을 사가는 매점처럼 뽑힌 자리는 환하다

 

 

p. 46~47
나를 깨우고 갔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기에 나무를 떠나온 새. 저 잎들은, 
다시 날아오를 수 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누가 나를 깨웠다.

눈사람.
그는 구름의 종족이지만,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언제나 몸부터 태어난다.
드디어, 머리를 굴리려는데
누가 나를 깨웠다. 나는 깨어 있었는데.

봄이 왔다.
어느 해 바른 식당에서 냉이를 집으려는데 누가 나를 깨웠다. 나는 보고 있었는데. 눈 녹은 비탈 무지갯빛 아지랑이 웃을 때 광대뼈 아래 팬
네 보조개.

정오의 태양, 불길을 흉내내며 일렁이는 여름 바다에서

누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쳐다보면,

내 어깨를 짚고 내가 서 있었다. 막 깨어난 내가 나를 깨웠던 나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했다.
고맙다고 말하고 잘 가, 라고 말했다.

아주 짧고 슬픈 인사였다. 

 

 

p. 62~63
취중 농담

빠르게 앞서 걷다가 갑자기 획 돌아보았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뒤집히듯이,
빨갛게 익은 얼굴로

너는 말했다. 등뒤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타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환하게 켜지는 창문을 하나하나 셀 수 있는 것처럼
네 목소리를 다 셀 수 있을 거 같다.
네가,

어차피 세상은 망할 건데, 뭔가 고장나고 오염되고 부딪쳐서 망하는게 아니라 아름답지 않아서 망할 건데,
나는 우리의 유쾌함과
기쁨과
사랑이 그것을 유예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어.

라고 말할 때,

나는 
양 한 마리와 양 두 마리와 양 예순일곱 마리쯤에서 사라지는 불빛처럼,
네 목소리 속에서 사라질 것 같다.

머릿속이 끓고 있으면 무엇을 넣으면 좋을까. 환하게 창문이 밤을 끓이고 있듯이
그리고,
미역국에서 멸치를 건져내며 머리에서 생각을 건져내는
방법을 생각했어
생각은 오래된 거지만,

여전히 뜨겁다.

모든 비법이 불 속에 있다는 말은 꼭 사랑에 대한 비유 같다고, 뒤집히는 고기 옆에서 졸아드는 국물 같다고,

누군가 내 머릿속을 부드럽게 저으며
농담을 건넨다.

 

 

p. 96
종례

배에서부터 하고 싶은 말이 차오르면 입안에 얼음을 넣었다. 얼마나 뜨거웠으면······ 물은 영원히 흘러내리는 화상 자국 같다.

매일매일 같은 물속으로 더 무거운 추를 달고 뛰어드는 것처럼, 매일매일 더 무거운 인생이 뛰어드는 몸으로 창문안에 있다.

 

 

p. 101
미래

슬픔에 고용당한 사람들은 사랑에 관한 수백 가지 말을 알고 있지만, 마음은 또한 물에 담가둔 고기덩이 같아서 아무리 온도를 낮춰놓아도 조금씩 상해간다.

 

 

p. 104~105
누구여도 좋은

내가 조금 더 젊었을 때는 누군가 살아 있었을 때 누구여도 좋은 누군가
어떻게 살 거냐
물으면, 나는 머뭇거리고 넌 되물었지만 아이가 있는 형들은 다 대답을 가졌다
그게 무서웠다
계획이 있다는 거 골목이 목적지를 가진다는 거
인생이 도달한다는 거.
용산역에 내렸을 때 누군가 나에게 전단지를 건넸다 빨간 고딕체로 쓰여진 미래는

외롭게 죽을 각오를 못하게 한다

청소부는 나무의 것을 빼앗아 가을의 것으로 만든다 나는 무심코 빗자루를 보았지만
얼마나 닳았는지 바닥이 알 필요는 없으니까

상점에는 완구용 빌딩이 있고 완구용 가로수가 있고 완국용 역사와 기차가 있어서 빌딩 사이로 기차가 달려가고, 달리다가 어느 순간 철로를 벗어난다
아이는 울고
울다, 기차를 팽개치면 빌딩은 무너지고 가로수는 쓰러지고 그래도 파란 모자 역무원은 서서 깃발을 들고 웃는다

어른들은 왜,
쓰러지지 않는 기차를 만들지 못할까 왜 쓰러질 기차를 만들어서는 그 앞에 아이를 세우는 걸까

유리에 이쪽과 저쪽이 함께 스미는 순간이 있다

면접을 보고 와서, 우리는 숲으로 난 창이 있는 카페에서 촛불을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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