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정다연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나에대한열정 2022. 1. 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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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연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2021

 

정다연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2021

 

 

p. 38~39
무기력

요즘 나는 바싹 마른 잎 같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하루 세번 약을 먹고 개와 산책한다
혼자에 가까워지고, 주기적으로 볕을 쬐는 일은 나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렇게 믿으며

공원에 도착한다

체조는 허파와 근육을 튼튼하게 만들어준다
믿는다 아무런 의심 없이
땅에 박혀 있는 벤치와 그 앞에 세워진, 적을 몰살한 전쟁 영웅의 동상을 믿는다 그것이 가져다준 평화를

한번도 깨진 적 없는 눈동자
무너질 듯, 넘어질 듯 자전거 핸들을 꺾는 아이의 등 뒤로
더는 날아가지 않은 비둘기

빛으로부터
동공이 시야를 열고 닫듯
울타리는 잔디를 계속해서 보호할 것이다

가두는 분수대를 뛰어내리는 물방울
물방울들
너무 가까이 가진 않는다

 

 

p. 53~55
유기

네가 뒤따라온다

나는 허리께까지 자란 들풀을 헤쳐 길을 만든다 소매에 풀물이 든다 나의 발끝에선 풀이 꺾이고, 꽃잎이 터지고, 언덕이 미끄러진다 너의 발끝에선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언덕이 일어선다

나는 그것이 불편하다

널 버리겠다 널 버리겠다는 마음을 품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무는 순식간에 벌목되었다가 다시 자라 내가 걷는 모든 걸음을 지켜본다 혹독한 증인처럼 뒤를 돌면 어느새 너는 내 발밑에서 죽어버린 것을 죄다 그러모다 품에 안고 있다 숨을 불어 넣고 있다.

너의 손을 딛고 작은 새가 날아간다

나는 그것이 불편하다 견딜 수 없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더 빨리 걷는다 너 역시 걸음을 더욱 빨리한다 너는 결코 증발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 너는 실종되지 않고, 불타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다 네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죽은 꽃이 다발로 만발하고 있다

내 발밑에선 자꾸 어린 양이, 어린 풀이, 어린 바람이 죽는다

나는 오늘 반드시 너를 잊을 것이고 결코 네가 날 앞서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끌리지 않을 것이다 노을이 지고 있다 나는 혼자 돌아갈 것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를 플래시로 비추고 비추면서, 네가 뒤따라오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네가 어떤 생각에 불을 지필지 추측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를 뼈대만 남은 극장 앞에, 몰락한 사거리에, 황폐해진 펄 중심에 데려간다 내가 걸음을 멈추면 넌 여기니 여기까지니 묻고 그러면 나는 다시 걷고 걸어 사람이 떠난 마을로, 더는 열매를 맺니 않는 사과나무 그늘 아래로 널 데려간다

걸음을 멈추면 멈출 때마다

나는 널 버리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과 장소가 필요한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걸으면

여기니 여기까지니 묻는 너의 목소리가 자꾸 날 앞지른다

 

 

p. 66
버닝

들여보내줘요.

당신 문 앞이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두번 다시 열릴 것 같지 않은 문이었다. 높고 차가운. 들여보내줘요. 간절히 문을 두드렸다. 내 목숨이 당신에게 달려 있을지도 몰랐다. 언덕 위 불길이 거세졌다. 어쩌면 당신이 기꺼이 문을 열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모닥불 안쪽 자리를 내주고 먹다 남은 구근의 뿌리를 내주고······ 바람에 밀려온 재 가루가 눈을 찔렀다. 희망을 걸고 싶었다. 잔뜩 충혈된 눈으로, 이승에서는 두번 다시 열릴 것 같지 않은 문이었다. 지문이 닿는 줄도 모르고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 줄도 모르고 문을 두드렸다. 믿음을 가지고 싶었다. 이 세상에선 다신 열릴 것 같지 않은 묵직한 문이었다. 높고 차가웠다. 문이 안팎으로 자라는 것 같았다. 두꺼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과 나 사이가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문을 열어줘요. 언덕에서 피어난 불길은 식지 않고 전진했다. 어디까지 불탈 수 있는지 지켜보자고 불을 지피는 사람들이 있었다. 빗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이 있었다.

얼음송곳을 쥐었다. 피투성이 손으로 문을 긁었다. 당신은 숨죽이고 있나. 아니면 이미 오래전에 떠나버렸나. 빛 한점 흘러나오지 않는 문틈 사이로, 내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불이 빨라지고 있었다. 어떤 곳이든 태울 것은 족함이 없다 외치는 그들은 미친 것 같았고, 땔감처럼 타들어가는

당신의 문 앞이었다. 어쩌면 당신이 문을 열어줄지 몰랐다. 지하 창고를 내주고 당신의 꿈이 밴 요를 내주고 피투성이가 된 손에 붕대를 친친 감아줄지도 몰랐다. 그 손이 아물때까지 밤을 지새워줄 수 있을지도. 모든 걸 걸어야 했다. 너무 오래 문을 두드려서 손은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부서진 손톱에 감각이 없었다. 당신은 이미 떠났나. 아니면 문 뒤에서 숨죽이고 있나, 도무니 열릴 것 같지 않은 문이었다. 문은 지나치게 커서 혼자서는 열 수 없어 보였다. 손을 놓았다. 희망을 걸었다. 죽으면 열리는 문이었다.

 

 

p. 78~79
사랑의 모양

빛이 지나치다.

지나치게 네가 온다.
나는 구멍을 하나 가지고 있다.
언제든 널 숨겼다가 꺼낼 수 있는.

창에 기댄다. 체리처럼 번져오는 노을, 노을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사람, 색색의 플라스틱 빨대들. 그런 건 내가 훔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숨기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물을 튼다.
하루가 정직하게 차오른다.
보고 있어
한번은 말하게 된다.

수도꼭지를 돌리듯 네가 따뜻해진다면 좋겠다.

회오리치는 빗물 배수관의 소용돌이, 합쳐지는 꽃잎과 이끼들, 구덩이를 가득 채우고 솟아오르는 빛의 입자들이
너는 아니지만

흠뻑 젖게 된다.

기댄다.

네가 아닐 리 없지.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숨막힐 듯 가득 찰 리가.

 

 

p. 82~84
가정

소파는 크림색이 어때? 때가 덜 타는 검정이 나을까. 티브이는 몇 인치를 사는 것이 좋을까.
너와 나 단둘만 볼 거라면 가장 작은 것이어도 좋지만

더 넓고 깨끗한 세계가 보고 싶어질 수 있으니까. 새털 같은 함박눈, 자글자글 잠수하는 은빛꼬리 물고리, 소금사막 지금은 없는, 어쩌면 생길 수도 있는 아이에게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진 않을까. 선명하게

확신할 수 있니. 너는 잠귀가 어두워서, 네가 잠잘 때 내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모르지. 나는 뒤척이니까, 서걱이는 이불, 스며드는 가습기 연기에도 잘 깨니까, 말한 적 있나, 윗 집 사람은 새벽 두시만 되면 변기 물을 계속 내려. 그 소리가 끝도 없이 내 입속으로 빨려와. 생각해 본 적 있어? 머리 위에 있는 것이 터질 듯 부풀어오른 배수관이라는 거. 폭식한 사람의 위처럼, 쏟아질 것 같은데. 나는 있지, 가끔 네 숨소리도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어,

그러니까 아주 커다란 침대를 사자. 서로의 윤곽이 마음껏 흘러갈 수 있도록. 빛이 새어들지 않는 암막 커튼을 치고 너와 나의 손으로 두꺼운 벽을 만들자. 새하얀 페인트칠, 다 덮어도 될까. 그래도 될까? 얼룩 한점 없는 백지, 속을 파고 드는 곰팡이, 명료하게 구분되는 네 옷과 내 옷. 한번도 헷갈린 적 없다.

집이 자랄 수 있을까. 너는 나의 배에서 한 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는 너와 내가 낳은 아이여야만 하고, 네 성을 가져야만 하는데. 나는 자꾸 너의 어깨 너머로 열린 문을 보지. 내가 낳지도 않은 아이를 상상하고, 무수히 사라진 너와 내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생각해.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창 너머 창이 너무 많다.

셀 수 없는데, 내 손을 잡고 있는 건 너뿐이지. 식탁은 4인용이 좋겠어. 각방에는 각자가 좋아하는 그림을 걸자. 의자에 올라가 못을 박는데 도무지 벽에 심어지지 않는다. 탕, 탕 균형을 잃었다가 회복한다.

그림이었다.

사람이 심은 건물이 건물을 뚫고 자라는.

벽이 줄어든다.

 

 

p. 88~89
유리로 만든 관

폭우가 내린다

욕조에 눕는다
피부가 하얗게 저물어간다
지워지고 지워지다 사라질 수도 있겠다

나의 질량으로 당신이 넘쳐흐른다 수조의 돌고래가 되는 일은 한 인간이 평생토록 욕조 안에서 죽어가는 일 손끝으로 물을 휘젓는다 당신의 표정이 부드럽다 눈물이 무한대로 가득 차서 우리는 부력으로 떠오를 수 있다

당신과 오래 누워 있으면
해부된 생쥐처럼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다

잘 보관된 표본
감정은
단정하다

폭우가 내린다 나와는 무관하게 손목과 다리가 씻기고 밤은 익어간다 당신이 차려놓은 꿈속으로 나는 빨려갈 것이다 
빗물이 차오른다 몸이 떠오른다 당신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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