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최승자 [빈 배처럼 텅 비어]

나에대한열정 2022. 1. 4.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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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빈 배처럼 텅 비어> 2016

 

 

최승자 <빈 배처럼 텅 비어> 2016

 

 

p. 9
빈 배처럼 텅 비어

내 손가락들 사이로
내 의식의 층층들 사이로
세계는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어언 수천 년

빈 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

 

 

p. 18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슬픔을 치렁치렁 달고
내가 운들 무엇이며
내가 안 운들 무엇이냐
해 가고 달 가고
뜨락 앞마당엔
늙으신 처녀처럼
웃고 있는 코스모스를

 

 

p. 26
당분간

당분간 강물은 여전히 깊이깊이 흐를 것이다
당분간 푸른 들판은 여전히 바람에 나부끼고 있을 것이다
당분간 사람들은 각자 각자 살 살아 있을 것이다
당분간 해도 달도 날마다 뜨고 질 것이다
하늘은 하늘은
이라고 묻는 내 생애도
당분간 편안하게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p. 31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그라너저러나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래도 언제나 해는 뜨고 언제나 달도 뜬다
저 무슨 바다가 저리 애끓며 뒤척이고 있을까
삶이 무의미해지면 죽음이 우리를 이끈다
죽음도 무의미해지면
우리는 虛와 손을 잡아야 한다

 

허(虛): 비다, 없다, 헛되다의 '허'

 

 

p. 35
나 쓸쓸히

나 쓸쓸히, 세계를 버렸었으나
나 쓸쓸히, 우주와 새로이 악수했었으나
나 쓸쓸히, 세계와 우주가 잊혀져가는
늦정원 안 다 늙은 사과 한 알 속의,
나 쓸쓸히, 나에게도 아득히 낯선
한 마리의 애벌레

(슬픔의 玄이 없으면 기쁨의 음악은 울리 수가 없다)

 

현(玄): 검다, 오묘하다, 심오하다의 '현'

 

 

p. 46
환갑

제 나이도 모르던 아이가
환갑을 맞아 그것
잊지 않으려 애쓰는 모양이
더 아이 같다

(어느 날 죽음이 내 방 문을 노크한다 해도
읽던 책장을 황급히 덮지는 말자)

 

 

p. 48
살다 보면

살다 보면 때로는 봄이 오겠지
때로는 낯선 태양 하나 새로 생기겠지
질펀한 절망 속에서도
오렌지 같은 희망은 있겠지

불러도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을 때
그래도 살다 보면 때로는 봄이 오겠지
어디서 낯선 태양 하나 새로 생기겠지

 

 

p. 50
나의 생존 증명서는

나의 생존 증명서는 詩였고
詩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시(詩): 시 '시' 

 

 

p. 56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과 떨어져 살아왔나
"보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아으 비려라
이 날것들의 生)

구름이 우르르 서쪽으로 몰라간다

 

생(生): 나다, 낳다, 살다의 '생'

 

 

p. 61
그 언행도

그 언행도 훔친 것이다
만든 것이다
거기에 그대의 역사가 과거와 현재가 있다
그 언행이 다른 언행에게
슬쩍슬쩍 말을 걸어 작당질을 하여
고급 운동권들과 카스트 제도들을 만들어낸다
人爲는 우리 모두를 지치게 만드는 족쇄들이다

 

인위(人爲): 사람 '인', 할 '위'  인위 - 자연의 힘이 아닌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일

 

 

p. 63
가다 가다가

가다 가다가 또 빠져서
삶이 죽음이라고 죽음이 삶이라고 
우기는 내가 있습니다
초월이 아직도 금시초문이라
그렇게 중얼거리는 내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소리를 잘 들으려면
고요해져야 한다
바람의 전언은 쉽게 잡히지 않는다)

 

 

p. 70
아이는 얼마쯤 커야 할까

가슴에 한 아름 꽃을 안고 있으려면
아이는 얼마쯤 커야 할까
 날마다 아이는 팔을 벌려 연습을 한다
아이는 무슨 꽃을 꿈꾸는 것일까
아이는 어쩌면 始原病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가슴에 한 아름
풀꽃을 안고 서 있을 꿈을 꾸면서

 

시원병(始原病): 비로소 '시', 근원 '원', 병들 '병', 정신분열증 환자가 겪는 증세

 

 

p. 79


세계에 코를 박고 있는
구름 한 장

세계 너머에 한눈을 팔고 있는
바람 한 겹

 

 

p. 87
내일의 유리창을 또 누가 닦을 것인가

하루가 열렸다 닫히고
또 하루가 다시 열렸다 닫히고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며"는 장자의 혼돈 이야기였다

내일의 유리창은 
또 누가 닦을 것인가

  

 

p. 89
아침이 밝아오니

아침이 밝아오니
살아야 할 또 하루가 시큰거린다
"나는 살아 있다"라는 농담
수억 년 해묵은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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