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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1. 1.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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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1981

 

 

최승자 시인은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에서 '이 시대의 사랑'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 시집은 첫 시집인 것이다.

 

스스로를 누르고 있는 절망이나 슬픔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그 속에 빠져있는 시인의 시 세계가 암울하기 그지없다. 조금은 들뜬 사랑노래를 기대했다면, 첫 시를 읽는 순간 내려놓아야 한다.

 

 

p. 9
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p. 13
네게로

흐르는 물처럼
네게로 가리.
물에 풀리는 알콜처럼
알콜에 엉기는 니코틴처럼
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
네게로 가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 균처럼
삶을 거머잡는 죽음처럼.

 

 

p. 22
버려진 거리 끝에서

아직 내 정신에서 가시지 않는
죄의 냄새, 슬픔의 진창에서 죄의 냄새

날마다 나는 버려진 거리 끝에서 일어나네.
지난밤의 꿈 지나온 길의 죄
살 수 없는 꿈 살지 못한 죄.
그러나 지난밤 어둠 속에서
나의 모든 것을 재고 있던 시계는
여전히 똑같은 카운트다운을 계속하고 있다

달려라 시간아
꿈과 죄밖에 걸칠 것 없는
내 가벼운 중량을 싣고
쏜살같이 달려라
풍비박산되는 내 뼈를 보고 싶다.
뼛가루 먼지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흐흐흐 웃고 싶다

 

 

p. 24~25
올여름의 인생 공부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똑똑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앨튼 존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클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X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면 서XX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도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p. 33~34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렀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오래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스한 불빛 안으로 숨어 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p. 42
가을의 끝

자 이제는 놓아버리자
우리의 메마른 신경을.
바람 저물고
풀꽃 눈을 감듯.

지난여름 수액처럼 솟던 꿈
아직 남아도는 푸른 피와 함께
땅속으로 땅속으로
오래전에 죽은 용암의 중심으로
부끄러움 더러움 모두 데리고
터지지 않는 그 울음 속
한 점 무늬로 사라져야겠네.

 

 

p. 44
내 청춘의 영원한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p. 53
청계천 엘레지

회색 하늘의 단단한 베니어판 속에는
지나간 날의 자유의 숨결이 무늬 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청계천엔
내 허망의 밑바닥이 지하 도로처럼 펼쳐져 있다.
내가 밥 먹고 사는 사무실과
헌책방들과 뒷골목의 밥집과 술집,
낡은 기억들이 고장난 엔진처럼 털털거리는 이 거리
내 온 하루를 꿰고 있는 의식의 카타곰.

꿈의 쓰레기 더미에 파묻혀,
돼지처럼 살찐 권태 속에 뒹굴며
언제나 내가 돌고 잇는 이 원심점.
때때로 튕겨져 나갔다가 다시
튕겨져 들어와 돌고 있는 원심점.
'그것은 슬픔'

 

▶ 엘레지는 원래 '슬픔의 시', '죽은 이에 대한 애도의 시'를 뜻하였으나 18세기경부터 슬픔을 나타내는 악곡의 표제로 많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비가(悲 슬플 비, 歌노래 가)라고 번역되고 있다.

 

▶ 카타곰 - 카타콤(caracomb)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카타콤은 로마시 주위의 지하무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그 의미가 확장되어 굴과 방으로 이루어진 모든 시설물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p. 56
외롭지 않기 위하여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던 온밤 내 시계 소리만이
빈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p. 65
부끄러움

그대 익숙한 슬픔의 외투를 걸치고
한낮의 햇빛 속을 걸어갈 때에
그대를 가로막는 부끄러움은
떨리는 그대의 잠 속에서
갈증 난 꽃잎으로 타들어가고
그대와 내가 온밤 내 뒹굴어도
그대 뼈 속에 비가 내리는데
그대 부끄러움의 머리칼
어둠의 발바닥을 돌아 마주치는 것은 무엇인가

 

 

p. 71
이 시대의 사랑

불러도 삼월에는 주인이 없다
동대문 발치에서 풀잎이 비밀에 젖는다.

늘 그대로의 길목에서 집으로
우리는 익숙하게 빠져들어
세상 밖의 잠 속으로 내려가고
꿈의 깊은 늪 안에서 너희는 부르지만
애인아 사천 년 하늘빛이 무거워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물에'
우리는 발이 묶인 구름이다.

밤마다 복면한 바람이
우리를 불러내는
이 무렵의 뜨거운 암호를
죽음이 죽음을 따르는
이 시대의 무서운 사랑을
우리는 풀지 못한다

 

 

p. 79~80
자화상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에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빛 속에 저 눈부신 천성(天性)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毒이 전신에 발표하길 기다릴 뿐
배 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p. 81
너에게

마음은 바람보다 쉽게 흐른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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