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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최백규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2. 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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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규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2022

 

 

 

최백규 시인은 1992년 대구에서 태어나 명지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4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가 있다. 창작동인 '뿔'로 활동 중이다.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5
섬광

착한 사람을 사랑해서 간신히 착해져보려 하던 날들이었다 젊은 아버지는 마른 세면대 앞에서 덜 밀린 턱수염을 쓸며 나를 그렸으나 잘되지 않았다 짙은 안개가 비 냄새를 몰아왔지만 우기가 너무 멀었다 낙엽이 구르는 거리에 어둠만이 젖는 듯하다 휘발했다 번번이 살아남고 더러는 해하기도 하는 호시절이었다 젊은 아버지는 적당한 육체와 한가지 뜻이 있었고 잘못과 실패를 알았다 태운 냄비나 붙잡고 층계참에 주저앉아 남은 동전을 헤아린다든가 현관의 우산을 보며 자신만 기다리는 아내의 장마철은 조금 더 미래에 있었다 늘 소리친 후처럼 목이 아프고 사실 죽어도 상관없어서 직성이 풀릴 때까지 폭우를 맞았다 단칸방으로 넘친 물이 흐르는 장판을 걷어낼 때도 믿었다 신문지 위에 누워 일렁이는 천장을 올려다보니 먼지와 곰팡이도 비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젊지 않고 취한 아버지가 나를 안고서 평생 본인이 짓밟은 모두에게 용서를 빌었다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다 괜찮다고 했다 살의도 없이 여름을 보내주었다 열대어처럼 두 눈을 뜬 채 묵묵히 숨 쉬고 있었다

 

섬광: 순간적으로 강렬히 번쩍이는 빛

 

 

p. 18~19
여름의 먼 곳

오래된 마음은 장마에 가깝다

창가의 화분도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정말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싶어

귀를 가져다 대보기도 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커서

무언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꽃송이가 가슴을 뚫고
피어날 때마다

어떻게 꺾여야 아프지 않을지
헤아려보았다

 

 

p. 24~25
돌의 흉곽

호스피스 병동 한구석에 누운 그는 강바닥에 묻힌 돌이었다
병실마다 선산이었다

지금 가슴을 열지 않으면 암세포가 파고든다는데 수술비는 삼촌이 도박으로 탕진한 지 오래였다

사채업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하자 그는 자루 안에서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웅크렸다 여생 동안 돈에 묶여 물속으로 유기된 셈이다

언젠가 나는 물 바깥에서 배를 뒤집은 돌과 눈을 맞추며 앉아 있었고

어느 날 일터에서 귀가한 그는 가족에게 바람을 쐬러 계곡으로 떠나자 했다 주말 저녁이라 차들이 밀려나와 아주 어두워서야 황량한 저수지에라도 닿을 수 있었다

그맘때가 돌아오면 수면에 돌을 던지고 환하게 번져나가던 그의 웃음이 어른댄다

쓰러진 후부터 그는 매일 관을 내리듯 떨어진 꽃만 주웠다 어릴 적 어머니와 지키던 고물상 터로 돌아온 듯이 천막을 견디는 흉곽이 너울거렸다

나는 강바닥으로 가라앉으며
그의 심장을 머언 바다로 밀어주고 싶었다

 

흉곽: 등뼈, 갈비뼈와 가로막으로 이루어지는 원통 모양의 부분

 

 

p. 30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나를 번역할 수 있다면 뜨거운 여름일 것이다

꽃가지 꺾어 창백한 입술에 수분하면 교실을 뒤덮는 꽃
꺼지라며 뺨 때리고 미안하다며 멀리 계절을 던질 때
외로운 날씨 위로 떨어져 지금껏 펑펑 우는 나무들
천천히 지구가 돌고 오늘은 이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단 한번 사랑한 적 있지만 다시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너의 중교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몇평의 바닷가와 마지막 축제를 되감을 때마다
나는 모든 것에 거리를 느끼기 시작한다

누군가 학교에 불이 났다고 외칠 땐 벤치에 앉아 손을 잡고 있었다
운명이 정말 예뻐서 서로의 벚꽃을 떨어뜨린다

저물어가는 여름밤이자 안녕이었다, 울지 않을 것이다

 

 

p. 49
수목한계

우리에게 사랑은 새를 기르는 일보다 어려웠다

꿈 바깥에서도 너는 늘 나무라 적고 발음한 후 정말 그것으로 자라는 듯했다 그런 너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나도 온전히 숲을 이루거나 그 아래 수목장 된 것 같았다 매일 꿈마다 너와 누워 있는 장례였다 시들지 않은 손들이 묵묵히 얼굴을 쓸어가고 있었다

부수다 만 유리온실처럼 여전히 살갗이 눈부시고 따사로웠다

돌아누운 등을 끌어안고서
아직은 아무 일도 피어나지 않을 거라 말해주었다

 

수목한계: 지역의 환경 변화에 따라 교목이 자라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한계선

 

 

p. 90~91
유해

내가 죽은 거라 믿었는데
손을 마주 잡으면 따스했다

여과되지 않은 햇살이 심장에 뚫고 들어와 아스라이 퍼졌다

얼룩덜룩 물들었다

한번이라도 죽은 사람은 두번 다시 아물지 않았다 그저 차가워졌다
죽기 전부터 조금씩 그래왔다
넋을 잃고

천변을 걸었다 마른 팔목을 쓸면 무언가 놓쳐 깨뜨리는 것 같았다 쏟아진 아버지를 주워 담으려 웅크렸다 함께 생필품을 사 오던 길이 폭염 아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흐르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움켜쥐지 못한 손마디가 끈적해지도록

우리가 있던 세상에서 나만 살아도 될까

우리는 훔쳐둔 것을 다 잃은 심정으로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지 않은 채 건너다녔다 이상할 정도로 거리에 아무도 없었다
꿈이로구나
값싼 폭죽이 멎을 때까지 유기견의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새하얗게 센 뒷덜미로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검은 옷을 입은 내가 아버지의 군락에 장미 가시로 돋은 것 같아 불안해졌다 아버지는 손안에 꽃송이를 가만히 쥐어주었다
이것이 전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라며

손바닥을 펴보니 한줌의 온기만이 희미하게 묻어 나왔다

뿌리를 적시듯
한 몸에서 오래도록 죽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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