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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너를 혼잣말로 두지 않을게] 박상수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2. 1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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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너를 혼잣말로 두지 않을게> 2022

 

 

 <너를 혼잣말로 두지 않을게>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6~17
안개 숲


숲은 깊었다 나만 알던, 가끔 누워 있기도 하였던 묘지 주변으로 빗방울이 내리면 나무들이 웅크려 비를 막아주는 것만 같았다 잠든 것들이 깨어나는 시간,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누구라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작은 길을 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떠올리던 오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사람, 봉지 약을 들고 찾아간 날, 약을 건네주고 오는 길은 낮은 기침 소리가 따라오는 게 좋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덧없는 꿈이었다 학교 앞 저수지로 걸어 들어간 사람의 물빛을 떠올릴 때면 흘린 듯 그림자가 내게고 옮겨 오곤 했다 텅 빈 운동장에서 누군가 빈 병에 소리를 내고 있구나 그때마다 잘린 여름풀의 향이 퍼져 나가다가 흐린 방을 만들며 강낭콩 깍지처럼 내 슬픈 사람들을 감싸주고 있었다 빗방울이 자주 안개비로 바뀌던 곳, 그래서 걸음이 느려지던 곳, 오래 헤매는 마음으로 시내까지 나가서 아무나 떠나는 사람을 배웅하고 돌아오면 불을 끄고 벽에 기대어 선잠을 잤다 밤이 깊어지면 다시 숲으로 돌아가자고, 가로등 몇 개를 지나 바짓단을 적시며 어두운 길을 걸어 들어가면 반딧불이가 저수지 위를 드물게 날아가고 있었다 몸을 떨며 사랑했던 것들을 무대 위로 올리는 밤, 그 많은 것들이 전부 사람의 얼굴이어서 나는 어느 쪽으로도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p. 40~41
작은 선물

걸어도 걸어도 무엇도 보이지 않는 나날이 계속된다면, 갖고 싶어 햇살이 오래 들어오는 2층 창가, 담쟁이덩굴이 흔들리고 윤기 어린 나무 탁자 위로는 바스켓 화분이랑 핸드메이드 유리 동물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는 곳, 어른대는 빛 속에서, 내게로 다가오는 아이들이 있구나, 밝게 뛰어와서 내 발에 털을 부비는구나,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지금 네 손에 뭐가 닿는지만 생각해, 아이들을 쓰다듬으며 모나카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나눠 먹으며 나무 위 오두막에서 맞는 좋은 바람 같은 것, 종이 목마가 흔들리는 시간, 나는 여기서 들려오는 오후 네 시의 소리들을 좋아하지 옛날 양옥 건물 사이를 지나 학교 운동장의 쉬는 시간을 지나, 좁은 길을 겨우 빠져나가는 스쿠터의 소리까지 전부 구별하고 색칠해보자 그러는 동안 건널목 가까이 낮게 비구름이 다가오는 순간을 사랑하지, 장작불로 직접 볶아 내려주는 커피랑 스마일 쿠키 한 세트가 필요해요, 창밖으로 눈을 돌리며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기로 하지 나날이 막막하고 또 너무 많지만, 저기 나무 의자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과 다른 시간의 결이 있다면.

 

 

p. 58~60
어떤 일은 그냥 일어나기도 하지

자주 부딪히며 나는 걸어가, 멍 자국을 만들며 아무렇게나 나를 아프게 해, 괜찮아요 나는 이제 무해한 열매, 아니 미안해요 이제 나는 무용한 열매, 보도블록 위 검고 무른 자국들, 후드득 오디 열매처럼 떨어져 나간 손등과 무릎, 이마와 복사뼈, 딱딱했다고 믿은 모두 전부가 아무렇지 않게 버려져서 멍이 들어가, 나는 무용한 열매이니까, 그렇게 믿으면 이해가 되고 그렇게 믿으면 가만히 서 있어도 저녁은 오고, 저녁에는 얼굴을 감출 수가 있어서 그게 좋아서, 나는 천변을 걷다가 마지막 심정으로 전화를 걸어 언니, 여긴 사람이 많아요 팔을 흔들거나 난간에 종아리를 문지르는 사람들, 돌아갈 곳이 있어서 좋아 보이는 사람들, 누군가에게는 나도 그렇게 보이겠죠 약은 잘 먹지 않고 밥은 더 잘 먹지 못해요 내 얼굴의 이건 그늘이 아니라 녹음이라고 믿었어요 더 짙은 녹음 안에서, 검어지도록 짙어가는 녹음 안에서, 숲으로 연결된 집을 내는 사람은 나일거에요, 라고 믿어보고 싶었어요 그랬구나 응응, 그래서 거기까지 혼자 걸어갔구나 괜찮아 계단을 내려가면 거기 버려진 농구 코트가 있고 더 내려가면 바다에 반쯤 잠긴 벤치, 거기 너를 기다리는 내가 앉아 있을 거야 떠올려봐, 색깔이 바랜 벤치에 앉아 내가 너를 기다릴게 어젯밤에는 내 침대가 날아가는 꿈을 꾸었단다 문턱을 가뿐히 지나 아무도 없는 자정의 길을 떠가면서 핀 조명 하나가 낮게 켜져 있는 박공지붕 상점을 들여다보고 있었어 수수꽃다리 화단이 가지런한 길에서, 모든 것이 무사한 것처럼 보였던 밤, 꿈을 꾼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뻐서 깨고 싶지 않았던 밤, 잠들어 있는 작은 상점의 내일 아침은 어떨까 꿈꾸어 보았어 언니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지 모든 것은 그냥 일어나기도 한단다, 내겐 부리밖에 남지 않았지만 나의 부리로 네 깃털을 가다듬고 윤을 내어줄게, 그럴 수 없을 거라고 믿고 싶어도 어떤 일은 그냥 일어나기도 하는 거니까, 그 일들이 너를 미워해서 일어난 것은 아니니까, 이제 너를 아프게 하는 것으로 세상을 벌주려 하지 말아, 올겨울에는 연탄난로 곁에서 같이 얼린 홍시를 나눠 먹어야지.

 

 

p. 64~66
다하지 못한 마음

한 사람에게 다하지 못한 마음 다했음에도 더 하고 싶은 어떤 마음, 같이 걷고 있어도 어떻게 그런 것만 떠오르지 손가락 하나로 번갈아 건반을 누르듯 우리 같이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서, 봄빛 잘 구워진 기와지붕들을 내려다보지 맨날 뒤로 미루었던 것들을 이제 하나씩 해봐도 괜찮을까? 더 할 수 없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 그 사람이 여기 있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그만 몸에 힘이 플려 엉엉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너를 기다릴 것 같아,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지하철을 같이 탈 수 있다는 것,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마음에 담으며,그 사람들이 전부 집에 돌아가 포옹을 받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작은 식탁에 앉아 있는 저녁을 꿈꾸는 지금, 처음 있는 이런 마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어떤 마음, 어떻게 우리는 이럴 수가 있어서, 교각 밑을 출렁이는 저 많은 빛이 잠시 우리 것이라고 믿어보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까, 좋아해요, 라는 말이 떨리면서 흘러나오는 순간을 더할 수 없는 기분으로 좋아해요 꽉 차올라서 더 채울 게 없는데도 채우지 못한 것 같은 이런 이상한 슬픔과 빛, 소금과 허브로 잘 절여두었다가 건조시킨 후에 꽁꽁 싸매두자 1년 뒤에 연잎 껍질을 풀면 비로소 오늘의 이 기분이 손에 배어나도록, 우리 두 사람에게 시작해 우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반짝이며 풍기도록, 양손을 활짝 펼쳐서 서로를 기다려주는 사람, 한 사람이 품에 들어오면 다른 한 사람이 날개 뼈를 잡아 한 번도 떨어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녹아버리는 마음, 바람이 세서 피크닉은 어려울 것 같은 날에도 키 큰 나무 밑에서 눈을 감고 같이 누워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흩어지는 머리칼을 서로 정돈해주며 웃어보는 우리가 되자, 저릿해진 서로의 심장을 손바닥으로 다독이면 우리의 시간은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나무 계단, 올라가도 올라가도 영원히 끝을 알 수 없는 궤적으로 시간은 우리를 휘감아 오르고, 채널이 다른 라디오가 들려오고, 오후 네 시의 빨래 마른 냄새 같은 너와, 차가운 보리차를 빈티지 유리컵에 담아 한 모금씩 나누어 먹는 우리, 너에게 나는 다하지 못한 마음, 꽉 차올랐지만 더 채울 수 없어서 슬픈, 우린 절대 없는 것으로 서로를 그리워하지 말자, 없어진 것, 없는 사람, 없는 마음, 평생 그것을 생각하며 뒤에 남는 사람이 되지 않기로 하자, 한 사람에게 다하지 못한 마음, 다했는데도 끝내 그리워지는 이 마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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