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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2021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2021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대하여(책 앞 커버 안의 내용)
이 책은 일본에서 출판된 책이 아니라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이런 책을 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에 따라 출판되었다.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에서 남기고 싶은 문장들
p. 22
주관적인 인식이지만, 그저 흘러가는 '현재'일뿐인 인터넷 공간에 순간 웅덩이가 생긴 느낌이었다. 웅덩이가 생기면 사람은 처음으로 물을 의식한다. 그 의식이 쌓여 비로소 '앎'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p. 24~25
영화제는 나라는 존재가 자명하게 휘감고 있는 '정치성'을 표면화하는 공간이다. 눈을 돌리든 입을 다물든, 아니 그 '돌리고' '다무는'행위 자체도 정치성과 함께 판단된다. 하지만 이는 물론 영화감독에 한정된 것이 아니며, 사회에 참여하는 사람이 원래 지니고 있는 '정치성'일뿐이다. 일본이라는 나라에만 있으면 의식하지 않고 넘어갈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유럽 영화제에서는 이쪽이 표준이다. 지금 나는 그 '관례'를 따르고 있다. 물론 공식 기자회견이나 단상에서 연설할 때는 그런 행위를 피한다. '만든 영화가 전부'라는 사고방식이 역시 가장 심플하고 아름답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개인적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개별 취재에서 기자가 질문하면, "전문가는 아니지만······"하고 양해를 구한 뒤(이 부분은 대체로 기사에서 편집된다) 나의 사회적 정치적 입장을 되도록 이야기한다. 그로써 내가 만든 영화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고 깊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를 '정치적'이라고 일컬을지 말지는 둘째 치고, 나는 사람들이 '국가'나 '국익'이라는 '큰 이야기'로 회수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영화감동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큰 이야기'에 맞서 그 이야기를 상대화할 다양한 '작은 이야기'를 계속 내놓는 것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해왔다.
p. 27
영상은 감독의 의도를 초월해 눈치채지 못한 형태로 '찍혀버린 것' 쪽이 메시지보다 훨씬 풍성하고 본질적이라는 점을 나는 실감하고 있다.
p. 40~41
요시다 님은 <아무도 모른다>가 리얼리티가 결여된 판타지라고 지적하며, 그 근거 중 하나로 '도둑질 장면'을 들었습니다. "아키라와 같은 형편에 처한 소년은 망설이기는 해도 마지막에는 도둑질을 할 것이다"라고요.
아주 중요한 포인트지만, 제가 생각했던 건 '도둑질을 안 한다면 어떤 상황을 떠올릴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것이 출발점이죠. 그래서 친구에게 부추김 당하기 전에 한번 편의점 점장에게 의심받는다는 체험을 아키라가 하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점장이 이름과 학교 등을 물어보고 '경찰'이라는 단어를 내뱉게 했습니다. 아키라 입장에서는 그런 결과를 초래하면 형제자매들과의 생활이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위험성을 감지했기 때문에 아키라는 친구가 게임처럼 도둑질을 하자고 꾀어도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름 아닌 '그런 아이는 도둑질을 할 것이다'라는 확신에 대한 안티테제를 포함시켰다고 봤습니다. 히라이즈미 세이 씨가 연기하는 점장은 "아버지 안 계시니?"하고, '그러니 도둑질하려 했던 게 이해가 간다'라는 뉘앙스로 중얼거립니다. 바로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이겠죠. 저는 아키라라는 주인공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그런 '세상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것으로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p. 44~45
저는 '다큐멘터리'란 처음부터 목적이 뚜렷한 프로파간다와는 달리, (취재) 대상과의 관계 지속과 그 변화를 동시 진행으로 기록해나가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애초 의도했던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결론에 이르고 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재미이며, 어려움이며, 자유로움이며, 다큐멘터리가 지닌 '위험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유로운 '정신'은 극영화를 만들 때도 있지 않고 싶습니다. 지금도요.
p. 77
원자폭탄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태도를 명확히 내세우자면, 다른 한편에 있는 가해자의 기억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상호 보완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좀처럼 안 되니 이렇게도 단순한 '복수'가 세상에 넘쳐나는 게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p. 88~89
저는 다큐멘터리란 '상대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행위라는 것을 방송을 만들기 시작하고 시간이 좀 지난 뒤에 깨달았습니다......'상대의 언어로 이야기하기'위해서는 우선 철저하게 상대의 언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다르다'는 것이 대전제이고 그 위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모색해 나갑니다. 작품화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눈앞의 타자에게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언어와 세계관으로 상대까지 덮어버리지는 않았나, 즉 자기표현의 부품으로써 적절한 코멘트만 잘라내어 이쪽 세계에 봉사하게 만들지는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조작'도 이런 행위의 일종인 경우가 많은데, 그리 되면 더 이상 다큐멘터리를 찍는 의미가 없습니다. 거기서는 어떤 만남도, 발견도, 자기 개혁도, 커뮤니케이션도 생겨나지 않을 테지요.
'상대의 언어로 말하려는 것' '상대의 언어에 귀 기울이는 것', 거기서부터 자신의 문체를 형성해나가는. 일견 멀리 돌아가는 듯한 행위 속에서 다큐멘터리는 반짝임을 발견합니다.
p. 103~104
미아가 되었을 때 그 아이를 덮치는 불안은 아마도 부모를 잃었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닐 것이다. 그건 나 따위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 '세계', 그리고 그 무관심과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된다는 커다란 당혹감이다. 그 소회감의 체험이 소년을 공포의 밑바닥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것이리라.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주고 감싸주는 존재의 곁을 떠나 '타자'로서의 (그것이 선의든 악의든) 세계와 마주하는 - 사람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언젠가는 누구나 경험해야 할 이런 뜻밖의 만남을 예행연습으로서 폭력적으로 강제 체험하는 - 것이 미아라는 경험 아닐까.
p. 143~144
<공기인형>에서 인용한 요시노 히로시 씨의 <생명은>이라는 시
생명은 그 안에 결여를 품고
그것을 타자로부터 채운다
p. 158
제 입장은 지진을 의식적으로 소재로 하는 픽션을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저의 의식이 변했으니 그런 제가 만들면 영화도 분명 변할 거라는, 그 생각을 기둥 삼아 만들고 싶습니다. 영화가 변하는 게 아니라 제가 변합니다. 이건 지진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고, 제가 누군가의 아들이던 때 만든 것과 아버지가 되었을 때 만든 것을 비교해보면 부모 자식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지진 현장을 접한 제가 만든 것과 그렇지 않았을 때 만든 것 사이에는 영화 그 자체에도 변화가 있겠지요. 거기서 변화가 없다면 저는 거기까지일 겁니다. 일상에서 사람들을 응시해온 저로서는 의식적으로 바꾸려는 게 아니라 자연스레 반영되는 형태로 작품이 변화해나가기를 바랍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2021.02.24 - [무비 리뷰] - 단 하나의 기억만 허락된다면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원더풀 라이프 (2001)
2021.02.12 - [무비 리뷰]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세 번째 살인 (2017)
2021.01.24 - [무비 리뷰]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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