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방수진 <한때 구름이었다> 2019
<한때 구름이었다>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3~15
雨연히
다시 만날 수 없는 너의 일기장에 흘겨 쓴다 우리는 한때 구름이었다
질량은 유한하지만 경계는 없고 하지만 충분히 넓고 가벼운 우주, 하나의 홀씨
지상에 떨어지기 전 우리는 아주 가까워지거나 몹시 멀어져 왔다 손을 빠져나가기 전만큼만 파닥거리는 생선처럼
어릴 적 아파트 뒷편 공터는 아지트였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어도 각자 들고 온 우산을 펴 놓고 들어앉아 허락 없인 못 들어와 으스대곤 했었다 그러다
비가 오면 저마다의 손님을 받아 내느라 한바탕 소통이 일었지 우산을 들고 이곳저곳 달아나기도 했지
우산 없는 아이들보다 우산 있는 친구들의 고함 소리가 더 빨리 잦아들곤 했었다 젖지 않으려면 우산 하나에 모두 숨거나 하나씩 덧댈 수밖에 없어서, 갑자기 친구 손이 우산 속으로 쑤욱 나를 끌어당겼다 나란히 어깨동무한 난쟁이 행성들 만들어 놓고 우린, 그때 처음 깨달았는지 몰라
교집합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이다
비가 그치자 우리는 서로를 중심에 놓고 뱅글뱅글 공전하기 시작했다 비가 그쳤어도 손을 놓지 않고 비가 그쳤어도 젖은 옷 말리지 않고 비가 그쳤어도
우리는 여전히 구름이다 난 방금 당신의 겨드랑이를 스쳐 지구 반 바퀴를 걸어왔다 악수하자 멀어지는 간격의 방정식
당신의 중력은 나의 척력마저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 태초의 저 흩어지지 않을 만큼만 모여 있는 한 뭉치 안개꽃,
우리,
구름처럼.
척력: 같은 종류의 전기나 자기를 가진 두 물체가 서로 밀어 내는 힘
p. 16~18
폭우
너는 말을 하다 말고
눈을 감았다
커피는 따뜻했고
찻잔은 조금씩 기울었다
한참 동안 침묵의 냄새를 맡았다
커피가 한 겹씩 증발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당신이 감은 것이
눈이었는지
심장이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커피는 점점 줄어들고
침묵은 짙어져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지 분명
오래 볶은 원두 탓이다
원망하면서
우리는 두 눈을 감고 있었고
귀로는 시간을 감고 있었고
비로소 장마가 시작되고 있었지
예감은 속눈썹 위로 떨어진다
차마 두 눈을 치켜뜰 수 없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거리 위에는 차마 태어나지도 못한 말들이
지상으로 한데 쏟아지고 있었네
창문에 매달린 빗줄기가 괴성을 지르며
떨어져 하수구로 달려간다 문득
감은 내 두 눈에서 그리운 냄새가 흘러내렸다 뚝ㅡ
부러진 그리운 말 하나.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십 년 만의 폭우라지
두 눈은 감은 채
찾잔은 말라 간다
보고 싶은 웃음들
바닥이 흥건하다
p. 19
ㄱ의 감정
곡선의 아름다움은 직선의 외도에 있다. 걸어온 것들을 그 자리에서 추락시키고 뼈를 꺾고 살을 베어 처음과 끝 그 태생적 외로움을 안으로 안으로만 품어 주는 일. 직선이 제 팔을 꺾어 곡선이 될 때 수만 개의 관절이 부서지고 뒤틀린다. 차마 둥글어지지 못한 것들은 각이란 허공을 가지지. 어둠을 낳고 어둠으로 깊어진다. 품을 수 없는 것들은 가두어 내려앉아 버리고 밑으로만 밑으로만 아득해지지. 하이힐이 섹시한 이유는 곧고 날렵해지는 다리 곡선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의 무게를 버티려 최대한 몸을 웅크린 삼각의 감정 때문이다. 발뒤꿈치의 동동거림, 그 허공의 눈빛 때문이다. 그래서 견디는 것들은 모두 슬프지. 버티는 것들은 간절하다. 평생을 고개 숙여 허공을 받아 내는 저 ㄱ처럼.
p. 22~23
도넛 이론
우회전한 내가 사는 세계가
좌회전한 당신이 사는 세계를
몰래 뒤쫓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향해 항해한다고 해도
막다른 골목을 만나거나
끄트머리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끝없이 당신을 끌어당기지만
태어나기 전에 죽고
밤을 지새울수록 어려지는 날들이 지나도
우리가 서로에게 멀어지고 있다는 것은 모를 거예요
물론 뻥 뚫려 출렁거리는 기억의 바다를
가로지른다면 당신을 따라잡을 수도 있겠지요
달콤하고 뜨거운 비명을 지르며
돌아보는 당신을 한입 가득 깨물어 볼 수 있을지도
하지만 나를 탈출하려는 당신의 속도와
당신에게 들어가려는 나의 발걸음은 알지도 몰라요
우뚝 선 당신의 그림자와 앉은뱅이 나의 그림자는
결코 겹쳐질 수 없을 거에요
먼 행성의 공전이 우리를 기쁘게 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공전이 먼 행성을 춤추게 할 수는 없듯이
p. 34
인정
- L에게
당신이 떨어뜨리고 간 날숨 때문일까 오른쪽 가슴 위 붉게 야생화 몇 송이 피었다. 길고 가는 꽃잎 한껏 내 두 가슴 끌어안고 시큼한 향기가 기억 가장 은밀한 곳까지 퍼질 때 나는 피어나지 활짝, 이유 없이 춤을 추는 야생화처럼, 뿌리는 무성히 발끝까지 자라 싱싱하고 온갖 길 잃은 바람들이 몸을 뒤틀며 감정을 유린하는 새벽.
어쩌면 우리는 부화 직전의 알, 알 속에서 하나둘씩 세던 목마름, 그 깨질 것 같은 기다림이 무서웠지. 향기가 진해질수록 미운 당신은 무성해지고 당신이 무성해질수록 내 두 발과 두 귀는 정처 없이 아득해졌지. 당신은 여전히 추악하지만 눈을 감아도 아름답다. 이토록 잔인하다. 슬픔이 겨울보다 차가워져 녹지 않던 하루, 하지만 난 어둠보다 더 어두운 것이 내 안에 있음을 보았지. 손끝 사이로 위태로운 비로소 시들해진 이파리 하나. 당신의 등마냥 쓰다듬으며 한참을 쓸쓸했었다.
p. 71~72
낙엽을 버티는 힘
가랑비 몇 방울에도 못 이기는 척
떨어지는 잎사귀가 있다
잎맥 끝자리부터 몸을 뉘어 놓는, 허나
누군가의 어깨 위로 제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낙엽과 낙엽 사이 그 허공의 힘으로 눕는다
평생, 서로의 등짝만 보고 살아간다는 일
밤이 되면 우리는 누군가를 견뎌야 한다 아래층 여자는 나의 등을 나는 윗집 남자의 등을, 밀어야 한다 그 등짝에서 박차고 나왔던 식탁이 보이고 뺨 위로 스친 손바닥이 보이고 내지 못한 이력서들로 가득 찬 책상이 보이지 누군가 이 천장을 밀고 우리의 등짝을 받치고 있다는 것, 한 평 남짓한 방이 밀어 주는 힘으로 쌓여 가는 우리들, 허공들
몇 가지 음식 나누어 주러 들른 옆집 벽 뒤로
낙엽들이 조금씩, 들썩이고 있다
어떤 사내가 밟아 깨우기 전까지 그들은
제 뒤를 못 본 채 꿈을 꿀 것이다
매일 누군가의 등짝을 밀면서도
우리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이유를 몰랐던 것처럼
p. 95~96
허공사용설명서
가만히 또각또각 허공을 씹으면
그 옛날 마술 문처럼
돌돌 말려 있던 세상의 소리들이
딸꾹질처럼 터져 나오지
이 빠진 노인의 헐거운 볼
갓 잇몸을 뚫고 나온 아이의 묽은 어금니
충치 빠진 자리 불쑥 생긴 웅덩이 속에서도
시간은 성킁성큼 자라고 있는 것을 알지
뚜벅뚜벅 절름거리던
아버지 발뒤꿈치 소리
또각또각 몰래 집 나가던 엄마 하이힐소리
헤어지던 날 말없이 탁탁 식탁 두드리던 네 검지 소리
슬픔이 낡아 가는 소리
기억이 벗겨지는 소리
울음이 해지는 소리
죄다 내 볼 속에 있다는 것을 알지
지나간 자리마다 푹푹 구름이 쌓이고
보듬어 줄 수 없는 것들만이 손끝에서 파르르 떨릴 때
느리게 느리게 허공을 씹으면
기분이 좋아지지
천천히 천천히 허공을 부수면
반응형
BIG
'북리뷰 > 문학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히스테리아] 김이듬 시집 (20) | 2022.02.13 |
---|---|
[시] [그대에게 넝쿨지다] 임두고 시집 (26) | 2022.02.12 |
[시][너를 혼잣말로 두지 않을게] 박상수 시집 (48) | 2022.02.10 |
[시][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정호승 시집 (28) | 2022.02.09 |
[시][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최백규 시집 (56) | 2022.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