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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그대에게 넝쿨지다] 임두고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2. 12.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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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두고 <그대에게 넝쿨지다> 2021

 

 

 

 <그대에게 넝쿨지다>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6~17
잎이 건네는 말

위내시경을 들이밀고
한 두어 달 속병을 앓았다
자목련 꽃잎들이 쉰 목청으로 떨어져 내렸고
병원을 오가는 길 옆 폐차장 폐차들 속에서
내 모습이 어른거렸다
거울 앞에 서니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고사목 한 그루
물방개며, 풀무치며, 검은 물잠자리
아직도 어린 시절들은
온전히 내 손아귀 안에 꾸물거리고 있건만······
그래, 내가 지나온 길들은 너무 깊은 물속이거나
너무 높은 벼랑이었어
늘 기다림으로 징검다리를 놓고
기다림으로 검불을 부여잡아야 했지
끼니때마다 고개를 젖혀 한 움큼의 알약을 털어 넣으며
쓰라린 속병의 치유를 기다리는 나는 또
이 기다림의 의미를 무엇으로 유추해야 하나
그사이 꽃 진 자리에 잎들이 다시 돋아나
잎잎이 정정한 귀를 열고, 입술을 열어
내게 무언의 말을 무한히 건네고 있다
아픔도 분명 꽃일 거라고
그것도 사람에게만 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꽃일 거라고

 

고사목: 말라서 죽어 버린 나무

풀무치: 메뚜깃과의 곤충

 

 

p. 20
봄날에

햇볕 때문일까, 바람 때문일까
꽃잎들이 뚝뚝 뜯겨 나간다.
너를 잊지 못하는 무게로
햇살 속에 깊이깊이 가라앉아
배를 꿈꾼다.
절반은 추억이고 절반은 몽상인
낡은 가슴을 펼쳐 놓고
눈물의 못을 박는다.
언덕배기에 얼룩진 산도화 한 그루
부풀 대로 부풀어 허공 속으로 휘어지는데
세월을 견디지 못한 꿈들도
저처럼 휘어져
햇살을 가르는 배로 뜨는 것일까.
무지개로 뜨는 것일까.
끝내 꽃향기를 모르는 내 눈앞으로
세월의 빙판이 번들거리고
봄이 미끄러져 간다.

 

 

p. 116~117
스마트폰

텔레비전 앞에서 거의 바보가 다 된 인간이
모든 것을 훔치거나 빼앗아 삼켜 버리는,
아귀 같은 스마트폰 앞에서 완전 바보가 되었다.

길을 가면서까지
이어폰을 낀 채 스마트폰에 빠진 인간들은
청력을 도둑맞고 시력을 도둑맞아
들리는 것도 못 듣고
보이는 것도 보지 못하는
길거리의 귀머거리, 청맹과니가 다 되었으며

방 안에 틀어박힌 채 손가락만 까닥여
돈거래를 하고, 쇼핑을 하고, 서류를 떼는 사이
인간들은 이미 자폐 증세, 치매 증세가 심각해
스마트폰 세상 밖 현실적 시공간과의 대면을
오히려 낯설어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스마트폰 세상 속에 피는 웃음꽃에
무슨 향기가 있으며
스마트폰 세상 속에 출렁이는 눈물바다에
무슨 소금기가 있으랴.

미각과 후각과 촉각은 마비되고
시각과 청각만 비대한 스마트폰이
인간들의 눈 귀가 되고, 손발이 되고,
두뇌와 가슴이 되는 사이,
우리들은 그저 보고 들으며
서둘러 말할 줄만 알았지,
정작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으며
깊이깊이 생각하고 느끼는 법은
까맣게 망각하고 만 셈.

필요한 것보다 불필요한 것들로 넘쳐 나는
스마트폰 속 세상은
이미 정보의 쓰레기 하치장.
굳이 소통할 이유도 없는 먼 사람들을 불러내어
공허한 수다의 시간을 메우느라
정작 면전의 사람에게는
대화는커녕 시선마저 외면해 버리는
배려도 사랑도 모르는 인간들이 어디 인간인가.
걸신들린 흡혈의 스마트폰에
뜨겁고 신선한 피를 다 빼앗겨 버린
냉혈의 인간 기기, 로봇일 뿐.

 

청맹과니: 겉으로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는 눈 또는 그런 사람. 사리에 밝지 못하여 눈을 뜨고도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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