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위에는 겉표지 아래는 속표지. 같은 책 다른 느낌.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라는 말로 내 20대를 흔들었던 인물이다.
러셀은 제국주의의 나라 영국에서 태어났고, 원하면 뭐든지 누릴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할아버지(존 러셀 경)가 영국의 수상을 두번씩이나 지낸 귀족집안 출신이었으며, 왕실에서 하사받은 대저택에 살고 있으면서도 빅토리아 여왕이 여성의 참정권을 단호하게 반대할 때 여성해방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중에는 전쟁과 징병에 반대하는 글을 써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5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자서전 프롤로그를 통해서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저자 서문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
이 책은 학자들을 대상으로 쓴 책도 아니고, 현실적인 문제를 그저 이야깃거리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쓴 책도 아니다. 이 책에는 일반인들이 모르는 심오한 철학이나 해박한 지식이 담겨 있지도 않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이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상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독자들에게 내놓은 비결은 직접 경험을 통해 확인한 것들이며, 이 비결대로 행동할 때마다 나는 더욱 행복해졌다. 이 책의 비결을 통해 불행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만이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진단하고 거기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기 바란다.
나는 불행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노력하기만 하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이 책을 썼다.
p. 16~25
이 글에서는 문명국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마다 겪고 있는 일상적인 불행에 대해 다룰 것이다. 즉 분명한 외적 원인이 없으니 달아날 길이 없는 것 같고, 달아날 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참아내기 힘든 불행을 치유할 방법을 제시하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이런 불행은 대부분 세계에 대한 그릇된 견해, 잘못된 윤리와 생활습관에서 비롯되는데, 이런 요인들은 인간이나 짐승이 누리는 행복이 근본적으로 의존하기 마련인 자연스런 열정과 욕구를 짓뭉갠다. 이런 불행은 개인의 힘으로 좌우할 수 있다. 나는 보통의 운으로도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변화의 방법을 제안할 작정이다.
이렇게 삶을 즐기게 된 비결은 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대부분은 손에 넣었고,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단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삶을 즐기게 된 주된 비결은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였다는 데 있다.
나는 차차 자신과 자신의 결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법을 배워나갔다. 나는 외부의 대상들, 즉 세상 돌아가는 것, 여러 분야의 지식, 그리고 내가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는 사람도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세 가지 유형으로 죄인,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 그리고 과대망상에 걸린 사람을 들 수 있다.
내가 말하는 죄인이란 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탓한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속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과 마음속의 자아상이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킨다.
물론 그는 이런 쾌락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자제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하면서 자신이 타락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자기도취는 어떤 의미에서는 습관적인 죄의식에 정반대가 되는 개념이다. 자기도취는 자신을 찬미하며 또한 남들에게 찬미를 받고 싶어하는 태도다. 물론 자기도취는 어느 정도까지는 정상적인 것이고 탓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자기도취는 큰 해악이 된다.
과대망상은 병적인 것이든, 정상적인 것이든 모두 심한 굴욕감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어떤 형태로든 정신분석학적인 억압이 존재하는 경우에 진정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적절한 한계를 지키는 권력은 엄청난 행복감을 안겨주지만,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 둔갑한 권력은 설사 외적인 파멸을 일의지 않을 수는 있어도 내면의 파멸은 결코 피해갈 수 없다.
불행한 사람들은 늘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자랑하는데, 그것은 꼬리 잃은 여우가 하는 자랑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무익한 것이다. 그가 불행을 치유할 수 있게 하려면 새로운 꼬리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 꼬리 잃은 여우: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꼬리를 잃은 여우가 창피함을 모면하려고 다른 여우들에게 꼬리가 없는 편이 훨씬 낫다고 설득하다가 결국 망신만 당한다는 내용이다.
p. 35
미래만 주시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결과에 따라 현재의 의미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버릇은 위험하다. 각각의 부분이 가치가 없다면 그 부분들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 역시 가치가 없는 것이다.
p. 51
물질적 안락의 문제만 따진다면, 아무리 사업가가 파산했다고 하더라도 파산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보다 훨씬 풍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흔히 쓰는 생존을 위한 경쟁이란 말은 실제로는 성공을 위한 경쟁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경쟁을 하면서 내일 아침을 먹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을 뛰어넘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는 쳇바퀴에 갇혀 있는 신세가 아니다. 그들이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쳇바퀴가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p. 64
권태는 꼭 즐거운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 날이 다른 날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의 사건이 생긴다면 권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만,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람은 권태에 빠지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권태의 반태는 즐거움이 아니라 자극이다.
p. 69
일정한 양의 자극은 건강에도 이롭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문제는 그 양에 있다. 자극이 너무 적으면 병적인 갈망을 자아내고, 너무 많으면 심신을 황폐하게 한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권태를 견딜 수 있는 힘은 행복한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p. 71~72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단조로운 삶을 견디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현대의 부모들은 이런 점에서 크게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린아이는 주로 자신의 노력과 창조력에 의지해서 스스로 환경으로부터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자극은 약물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양의 자극이 필요하게 된다.
여린 식물은 계속 같은 토양에 가만히 놔둘 때에 가장 잘 자라는 법인데, 어린아이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잦은 여행을 하고 지나치게 다양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좋지 않다. 이런 어린들은 자라서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해서 반드시 견뎌야 하는 지루함조차 참지 못하는 어른이 될 수도 있다.
p. 77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또 한 가지는 늘 낯선 사람과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동물들도 그렇지만, 인간은 자연적 본능 때문에 낯선 상대를 만날 때마다 우호적인 태도를 취할 것인지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상대를 탐색한다.
p. 79~81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는 데 몹시 서투르다.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는데도 걱정거리에 매달려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현명한 사람은 고민을 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 때에만 고민하고, 고민을 해도 효과가 없을 때에는 다른 생각을 하며, 밤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은 그 문제에 맞닥뜨려야 할 때를 제외하면 털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한시도 쉬지 않고 지나치게 고민하는 것보다 꼭 필요한 때에 적당하게 고민하는 침착한 태도를 기르면 행복과 능률을 엄청나게 증진시킬 수 있다. 곤란하거나 심각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에는 모든 자료를 이용할 수 있을 때 즉시 그 문제를 깊이 숙고해서 결정을 내려라. 일단 결정을 내린 다음에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이상 결코 그 결정을 번복하지 마라. 망설임만큼 심신을 지치게 하면서 쓸데없는 것은 없다.
걱정하고 있는 문제가 대단치 않은 것임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걱정을 줄일 수 있다.
나의 행동은 내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며, 결국 내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또한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아무리 큰 슬픔도 이겨낼 수 있다. 마치 인생의 행복을 끝장나게 할 것처럼 보이던 심각한 고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사그라져, 나중에는 그 고민이 얼마나 강렬했는지조차 거의 기억할 수 없게 된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면 자신의 자아는 세상에서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p. 84~86
어떤 불행이 닥쳐오면 진지하고 신중한 태도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일어날 수 있는 불행을 직시하고 나서는, 그 불행이 그렇게까지 끔찍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만한 적절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제시해보라. 그럴만한 이유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도 나 자신에게 우주적 중요성을 가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법이니까. 얼마 동안 최악의 가능성을 꾸준히 응시하면서 진정한 확신을 가지고 "좋아, 그까짓 것 별 문제 아닐 거야"라고 말해보라. 그러고 나면 걱정이 엄청나게 줄어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서너번 되풀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최악의 사태를 직시하면서도 전혀 거리낌을 느끼지 않게 되면, 당신의 걱정은 말끔히 사라지고 대신 일종의 쾌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아주 일반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두려운 생각이 들 때마다 다른 일을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모든 종류의 두려움은 그것을 직시하지 않으면 더욱 심해진다.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시선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어떤 무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오히려 부추기는 꼴이 된다.
모든 종류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올바른 방법은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그러나 매우 집중적으로 그 두려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 두려움에 대해 친숙한 감정이 들게 된다. 이러한 친밀감이 생기면 마침내 두려움의 칼날은 무뎌지고, 모든 문제가 따분한 것이 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문제든지 자신이 떨쳐버리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섬뜩한 마력이 힘을 잃게 될 때까지 보통 때보다 훨씬 강도 높게 그 문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p. 93~94
질투는 평범한 인간 본성이 가진 여러 가지 특징 중에서 가장 불행한 것이다. 질투가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불행을 안기도 싶어하고, 또 처벌을 받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을 때는 반드시 행동으로 옮긴다. 그리고 질투하는 자신 역시 불행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는 대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괴로워한다. 그는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가진 장점,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그들의 장점을 빼앗는다.
p. 101~103
나쁜 일은 저마다 서로 관련되어 있고, 한 가지 나쁜 일은 다른 나쁜 일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기 쉽다. 특히 피로가 질투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맡고 있는 일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대해서 불만을 느끼는데, 이런 불만은 힘이 덜 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질투하는 방식으로 표출되기 쉽다. 그러므로 질투를 줄이는 방법 중의 하나는 피로를 줄이는 것이다.
왜 선전 활동은 우애를 선동하려고 할 때보다 증오를 선동할 때 훨씬 더 성공적인가? 그 분명한 이유는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인간의 심리가 우애보다는 증오 쪽으로 더 쉽게 기울어지다는 데에 있다. 현대인의 심리는 불만에 가득 차 있고, 이미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자신은 자연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여러가지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누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서 깊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의 심리는 증오로 쉽게 기울어진다. 현대인이 누리는 즐거움의 총량은 원시 사회에 비하면 엄청나게 커졌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즐거움을 반드시 누려야 한다는 의식 또한 훨씬 증대되었다.
p. 111~113
성교육의 올바른 원칙은 간단하다. 사춘기가 되기 전에는 어떠한 성도덕도 가르치지 말고, 자연스러운 신체 기능에 대해 혐오감을 주입하지 말아야 한다. 성교육이 필요한 시기가 되면 합리적인 교육을 하고, 관련된 논점에 대해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여기서 교육문제에 관해서 논할 생각은 없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교육이 불합리한 죄의식을 빚어내는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른들이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한 것이다.
어떤 때에는 이것이 옳다고 믿다가, 또 다른 때에는 저것이 옳다고 믿는 식으로 기분에 따라 다른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죄의식은 피곤하거나, 아프거나, 술에 취했거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원인에서 의식적인 의지가 약화되는 순간에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
올바른 방법을 사용한다면, 무의식에 잠재해 있는 유아적 암시를 물리칠 수 있고 심지어는 무의식의 내용을 바꿀 수도 있다. 만일 이성에 비추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행동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그 죄책감의 원인을 파헤치고 낱낱이 따져서, 그 죄의식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임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어렸을 때 어머니나 유모에 의해 각인된 인상들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무의식을 강하게 압박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확신을 강력하고 생생하게 유지해야 한다. 어떤 때는 합리적으로 생각하다가, 또 어떤 때는 비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태도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비합리적인 생각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가지고 그것을 깊이 있게 관찰하고, 그것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비합리적인 생각이 의식 속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나 감정을 밀어넣으려고 하면, 그 어리석은 생각이나 감정을 뿌리째 뽑아내어 낱낱이 파헤친 다음에 내던져버려야 한다.
p. 115
죄의식은 바람직한 생활의 원동력이 되지 못한다. 실제로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불행하다. 이런 사람은 죄의식 때문에 괴로워하고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여긴다. 또한 자신의 불행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 쉽고, 그렇기 때문에 대인관계에서 기쁨을 얻기 어렵다.
p. 123
아무개가 당신을 두고 끔찍한 험담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자. 당신은 그 사람이 받아 마땅한 비난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아흔아홉 번이나 참았던 사실만 기억하고, 백 번째에 가서는 방심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에 대해 사실이라고 믿고 있던 비난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당신은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두면서 참았던 것에 대한 보답이 겨우 이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당신은 그가 한 행동이 못마땅하겠지만,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이 한 행동이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당신이 입을 열지 않았던 아흔아홉 번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당신이 입을 열었던 백 번째 일에 대해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p. 141
쓸데없는 소심함이 필요 이상으로 문제를 악화시키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여론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여론의 횡포는 여론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여론의 횡포에 비해서 훨씬 난폭하다. 개도 자기를 얕잡아보는 사람을 만났을 때보다 자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더 큰 소리로 짖고 더 거리낌없이 물어댄다. 대중 역시 이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대중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낌새를 보이는 사람을 발견하면, 대중은 좋은 사냥감을 만났다는 기대에 들뜨게 된다. 반면에 대중에 대해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발견하면, 대중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다.
p. 145~146
무지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는 전혀 알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 경험이 많은 자신들보다 젊은 사람들이 아는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들으면 격분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무지의 횡포에서 벗어난 사람들 중에는 너무 오랫동안 억압에 시달리면서 어려운 싸움을 치렀기 때문에, 결국에는 절망에 빠지고 열정을 손상당하는 경우가 많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젊은이들의 바람을 존중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바람을 존중하도록 하는 것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나이 많은 사람들의 삶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일단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나이 많은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똑같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 필요하다면 시행착오를 겪을 권리가 있다.
p. 147~148
내 생각에는 중요한 문제냐 사소한 문제냐를 따지지 않고, 남의 의견을 지나치게 존중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나도 전문가의 의견은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크게 보면, 굶어 죽지 않고 감옥에 가지 않을 정도로만 여론을 존중하면 된다. 이러한 한도에서 벗어나는 행동은 지나친 횡포에 자발적으로 굴복하는 것이고, 모든 면에서 행복을 가로막기 십상이다.
물론 일부러 여론을 조롱하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여론을 조롱한다는 것은 전도된 방식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여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정말로 여론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하나의 힘이자, 행복의 원천이 된다. 지나치게 인습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한결같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는 사회보다 훨씬 더 재미 있는 사회다. 각자의 성격이 개성적으로 발전되는 사회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개성이 유지된다.
이러한 사회적 자유의 원천이 상실된 현대 사회에서는 획일화가 위험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일부러 괴팍스런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일부러 괴팍스럽게 행동하는 것은 관례에 얽매인 행동을 하는 것 만큼이나 재미없는 일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그저 자연스럽게 타고난 성격대로 행동하되 결코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p. 149~151
모든 두려움이 다 그렇지만, 여론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의 마음을 옥죄어대며 발전을 저해한다. 두려움이 강하게 남아 있는 한,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기는커녕 참된 행복이 깃들어 있는 정신적 자유조차 누릴 수 없다. 행복의 필수 조건은 우연히 이웃이 되거나 알고 지내게 된 사람들이 지닌 비본질적인 취미나 욕망에 견주어 자신의 생활 방식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충동으로부터 비롯한 생활 방식을 확립하는 것에 있다.
설사 어떤 사람이 나쁜 평판을 얻게 될 만한 언행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악의적으로 보도하여, 무고한 개인의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이러한 관행은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치료법은 단 하나, 대중이 관대한 태도를 기르는 것 뿐이다. 대중에게 관대한 태도를 기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의 수를 늘려서, 그들이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데서 으뜸가는 즐거움을 찾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p. 158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지 않는 사람만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언제나 뜻밖의 성공에 놀라게 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뜻밖의 실패에 놀라게 된다. 뜻밖의 성공으로 인한 놀라움은 즐거운 것이지만, 뜻밖의 실패로 인한 놀라움은 불쾌한 것이다. 그러니 진취성을 잃을 정도로 지나친 겸손은 피하되, 지나치게 자만하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 하겠다.
p. 168~169, 171
일시적인 열광이나 취미는 근본적인 행복의 원천이 아니라 현실 도피의 수단에 불과하다. 현실 도피의 수단이라고 한 것은 이겨내기 힘든 고통이 다가오는 순간을 잊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다. 근본적인 행복은 무엇보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따뜻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사람의 일종이다.
중요한 관계든 사소한 관계든,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그 사람 자신의 흥미와 사랑을 만족시켜준다. 그는 호의를 베풀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도 거의 없지만, 설령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남의 신경을 거슬려 격분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하는 이상한 인물조차도 점잖은 재밋거리일 뿐이다.
행복의 비결은 되도록 폭넓은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관심을 끄는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p. 175
인생은 모든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길지 않다. 하지만 죽는 그날까지 인생을 채워줄 수 있을 만큼 여러 가지 대상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p. 184
진정한 열정은 망각하기 위한 열정이 아니다. 진정한 열정은 불행한 환경에 의해서 파괴된 경우를 제외하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의 하나다.
p. 186
열정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뛰어넘으려면 건강과 넘치는 활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물론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일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p. 225~226
부자들 중에서도 영리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처럼 열심히 일한다.
권태의 예방책으로 가장 적절하고, 바람직한 것은 일이다. 재미는 없지만 꼭 필요한 일을 하는 동안에 느끼는 권태는 하는 일 없이 허송세월하는 사람이 느끼는 권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의 야망을 지속시키는 것은 최종적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본질적인 요소 중 하나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일을 통해서만 야망을 지속시킬 수 있다.
p. 246~247
올바른 기분 전환 방법은 사고 작용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거나 적어도 현재의 불행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다.
불행이 닥쳤을 때, 불행을 제대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행복할 때, 폭 넓은 관심사를 기르는 것이 현명하다. 그럼으로써 현재 상황을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다른 생각과 감정을 제공할 수 있는 평온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인생의 폭을 협소하게 제한해서는 안된다. 인생의 폭이 협소할수록, 우연한 사건이 우리 인생의 모든 의미와 목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된다.
p. 249~250, 253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행복은 마치 무르익은 과실처럼 운 좋게 저절로 입안으로 굴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행복의 정복'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세상은 피할 수 있는 불행, 피할 수 없는 불행, 병, 정신적 갈등, 투쟁, 가난 그리고 악의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개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불행이 원인들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은 신이 베푸는 선물이 아니라 어렵게 쟁취해야만 하는 대상이고,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내적인 노력에는 어쩔 수 없이 체념을 해야 하는 경우가 포함될 수도 있다.
체념 역시 행복을 쟁취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체념이 담당하는 역할은 노력이 담당하는 역할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현명한 사람은 막을 수 있는 불행을 감수하지도 않겠지만, 피할 수 없는 불행을 만나도 결코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며, 피할 수 있는 불행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들여야 하는 시간이나 노력이 보다 중요한 목적을 추구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 불행을 감수할 것이다. 사소한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을때마다 안달하고 화내면서,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막대한 정력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정으로 중요한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감정적으로 너무 몰두해서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의 평화를 끊임없이 갉아먹게 놓아두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p. 254~255, 258
체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절망에 근원을 둔 체념이고, 다른 하나는 정복할 수 없는 희망에 근원을 둔 체념이다. 전자는 나쁜 것이고, 후자는 좋은 것이다. 중요한 일에 실패해 원대한 성공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버린 사람은 절망적 체념을 몸에 익히기 쉽다. 절망적 체념을 몸에 익힌 사람은 진지한 활동이라면 뭐든지 단념할 것이다.
삶의 주요한 목적은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데, 부차적인 목적만 실패를 겪는 경우가 있다.
그런 부차적인 고통들은 궃은 날씨를 만난 것 같은 사소한 불편으로 여겨야 한다. 갑자기 비가 오는 것을 가지고 안달복달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어떤 종류의 체념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직시하는 용기와 관련되어 있다. 이런 종류의 체념은 비록 처음에는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을 기만하는 사람이 흔히 빠져들기 쉬운 절망과 환멸로부터 이 사람을 보호해준다. 날이 갈수록 믿을 수 없어지는 사실을 믿으려고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만큼 사람을 지치게 하고 부아를 돋우는 일은 없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행복을 누리기 위한 필수조건의 하나다.
p. 260~262
외부적 환경이 불행하지 않은 경우라면, 열정과 관심을 자기 내부가 아니라 바깥 세계에 쏟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행복한 사람은 자유로운 애정과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이런 애정과 관심을 통해서, 또한 이런 애정과 과심을 베풀면 자신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신의 행복을 확고히 한다.
'북리뷰 > 비문학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나침반으로서의 "존엄". 게랄트 휘터 <존엄하게 산다는 건> (30) | 2021.03.01 |
---|---|
와튼 스쿨 협상 수업, 모리 타헤리포어의 <사람은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28) | 2021.02.20 |
보도 섀퍼 <멘탈의 연금술> (18) | 2021.01.30 |
레몬 심리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30) | 2021.01.17 |
웨인 다이어 <인생의 태도> (14) | 2021.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