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비문학반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나침반으로서의 "존엄". 게랄트 휘터 <존엄하게 산다는 건>

나에대한열정 2021. 3. 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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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랄트 휘터 <존엄하게 산다는 건>

 

당신의 죽음이 존엄하길 원한다면 먼저 삶이 존엄해야 하지 않겠는가

 

p. 12~14
나 자신이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의식하는 일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쓰며 성공만을 욕망하는 마음과 양립하기 어렵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존엄'의 문제다.
이 책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어떤 생각을 하고,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인간답게 해 줄, 우리를 성장하게 해 줄 다른 삶의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그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행동의 변화가 일어날 리 만무하다.

'무엇이 인간을 존엄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루고 있는 책들은 이미 많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가치, 존엄을 어떻게 우리 삶에 되살릴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더불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전혀 인식하지도 못한 사이 존엄을 잃게 만들고 마는 우리 삶의 환경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p.49
모든 사람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로 지나치게 분주하며, 쓸데없는 일에 간섭을 하느라 정작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다. 온갖 추측과 편견, 평가와 의도의 포로가 된 것이다.

 

 

p. 60
생명의 다양성을 파괴하거나, 인간 내면의 다양성, 즉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잠재력을 억누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사람에게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자신이 생각하는 존엄이라는 가치에 부합하는지를 돌아볼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생각과 행동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에서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존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에 모순될 경우 내면에 일어나는 동요를 느껴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야만 자신이 존엄하지 않은 행동을 인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존엄한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은 인생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p. 64~65
존엄이라는 개념을 언급한 최초의 인물로 역사학자들은 로마의 국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꼽는다. <의무론>에서 키케로는 인간을 특징짓는 것이 '숭고한 태도'와 '우월한 태도' 그리고 '존엄'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선한 것과 옳은 것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인간의 정신은 학습과 사고를 통해 성장한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인간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시도하며,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키케로가 이해한 존엄은 교육적인 측면에서의 덕목이었다. 모름지기 사람은 신중하고, 감정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하며, 검소하고, 금욕하며, 엄격하고 이성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에서 비롯된 개념이었던 것이다.

 

2020/12/14 - [북리뷰/비문학반] - 키케로의 <의무론>

 

 

p. 71~76
칸트가 생각하는 자연적인 존재, 즉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 땅과 같은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쓸모는 있으나, 특별할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동식물과 다르지 않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칸트는 이에 대해 인간이 본능에 구속되지 않는 '도덕적 자율성'을 가질 때 다른 생명체와 구분이 되며, 도덕적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칸트는 말한다.
"인간은, 모든 이성적인 존재는 수단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목적으로 존재한다. 너 자신의 인격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격에도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라."

칸트에 따르면 존엄이란, "인간을 다른 창조물들로부터 구분되게 하는 것"으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인격 속에서도 자신의 존엄성에 위배되지 않을"의무를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의 존엄은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타인에 의해서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함부로 대할 때에도 상처를 입는다. "자신을 벌레로 여기는 사람은, 짓밟히는 것에 대해서도 불평할 수 없다"고 칸트는 말한다.

칸트는 인격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절대적인 명령으로 규정했다. <도덕형이상학 정초>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인간은 타인에 대한 정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 또한 그러한 기대를 받음으로써 모든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 인류는 그 자체로 존엄하다.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한 혹은 자기 자신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안에 인간의 존엄함이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은 유용하기는 하지만 인간은 아닌 이 세상의 모든 생명, 모든 사물들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 어떤 가격에도 자기 자신을 팔아넘길 수 없듯 모든 인간은(이로써 자기 평가의 의무와 충돌한다) 타인에 대한 가치평가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없다. 인간은 인류가 가진 존엄성을 모든 인간에게서 발견해야만 하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타인을 존중해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

 

 

p. 86
특정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발전이 사회적 기피현상과 불안, 문제를 불러올 때 우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자기 이해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바로 이때 시대적 관념이 형성되어 널리 전파된다.

 

 

p. 103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과 같은 가치관을 유지하며 지금처럼 살아갈 새로운 공간이 아니라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이해다.

 

 

p. 105
자신의 세상과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실패의 고통 그리고 타자와의 만남에서 낯선 신념을 마주함으로써 자신의 사고방식과 이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 이는 인류 역사를 관통해온 인류 역사의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p. 111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삶의 중요한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발견한 해결책들을 기반으로 뇌가 구성되는 것이다. 만약 그 과정에서 보호와 소속감은 물론 개인의 창의력과 자기 신체에 대한 자율성을 동시에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경험의 강도가 클수록 그것이 뇌에 더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런 기본적인 욕구들은 뇌 안에 단단히 고정되어 자기 존엄성을 인식할 가능성도 더 높아진다.

 

 

p. 122~123
우리의 뇌는 수많은 단일 움직임들을 조정할 목적으로 상위의 행동 패턴을 만들어내고, 에너지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우리의 행동을 조정한다. 우리가 '사고방식', '태도'라고 일컫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각자에게 중요하고 흥미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특정한 환경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를 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이와 같은 태도 역시 자동으로 나타나는 뇌의 여러 반응 가운데 하나다. 특정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매번 그에 적합하고 현명한 행동 패턴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보다, 일관된 행동으로 이끄는 태도를 지니는 편이 에너지 소비가 적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같은 사고방식과 태도 역시 우리 뇌에 뿌리를 내린 상위 행동 패턴에 따라 조정되고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또한 유년기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를 '자아상'이라고 표현한다. 넓은 의미로 자아상이란 한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결정하는 개념으로, 이와 동시에 한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지, 어떠한 삶의 방향을 따르고 있는지, 어떤 가치를 토대로 결정을 내리는지를 나타내는 개념이기도 하다.

 

 

p. 178
결국 한 인간의 존엄성에 해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자신 밖에 없다는 것이다. 

 

 

p. 190~192
아이들은 가지시렁이 아니다. 열매를 많이 맺도록 잘라낸다거나, 철사로 고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자아상은 공동체 안에서의 소속감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일종의 내면의 나침반으로서 타인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자아상이 형성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유익한 경험을 통해 모든 아이들이 스스로 형성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갖게 되는 자아 성찰과 자아 형성의 과정에 급행은 없다. 아이가 보호받는 가운데 필요로 하는 만큼의 여유가 반드시 주어져야만 한다.
라틴어에서 수업, 학교, 학파를 의미하는 '스콜라'는 '여유'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스홀리'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즉, 공부라는 것은 충분히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오늘날의 학교에서는 이처럼 자기 결정과 자기 발견을 위해 필요한 여유를 찾아볼 수가 없다. 

어릴 때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무엇을 배우고, 어떤 능력을 가져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지시받으며 자라온 사람이 대체 무슨 능력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에 관심이 있고 즐거워하는지, 인생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더 나아가서는 어떤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지를 스스로 알아내겠는가. 과연 우리 아이들에게 이를 위한 여유가 주어진 적이 있는가. 무슨 수로 우리 아이들이 이 복잡한 자기 발견의 과정에서 기초가 되어줄 그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타인과의 관계는 어떻게 맺고 싶은지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p. 208
물론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기회와 자유에 대한 요구가 반드시 자기 존엄성에 대한 인식을 동반하는 것만은 아니다.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인간의 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수단으로 취급받고 이용당했던 경험에서 벗어나고자 마련한 해결책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이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과거의 사고와 감정,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권력이 돌아갔을 때 이들이 가장 쉽게 고안해내는,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 바로 다시 타인에 대한 억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다시 타인을 자신의 기대와 평가, 행동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다. 자신들을 억압하던 대상이 사라졌다고 해서, 이들의 뇌에 형성된 연결 패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역사는 반복된다. 억압을 타파하는 데서 더 나아가 스스로의 존엄함에 대한 인식을 강화할 수 있는 경험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p. 214~216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매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갈 것을 결정할 수는 있다. 조금 더 스스로에게 또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존중하며 살아가겠다고, 자기 자신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신뢰 속에서 조금은 호기심 넘치는 삶을 살겠다고.
시도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리고 어렵지도 않다.

 

※ 게랄트 휘터는 1951년 동독에서 태어났다. 

불안과 우울, 잠재력과 동기 부여 등에 관한 뛰어난 뇌과학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삶에 대한 통찰을 대중에게 친숙한 언어로 전하는 독일의 신경생물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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