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슴벌레 한쌍이 집에 온 이후, 마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를 들여다보듯, 난 그렇게 사육통을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데, 내가 공부한 바에 따르면, 왕사(왕사슴벌레)는 부끄러움(?)이 많아 인간의 인기척만 느껴져도 숨어버리는 사슴벌레인데, 어느 날인가부터 암컷이 밤이건 낮이건 시도 때도 없이 코박젤리(젤리에 코를 박고 먹는다 하여, 사실 사슴벌레는 코는 없지만, 아랫입술 수염이 있어 냄새를 맡는 기능을 한다)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긴걸까? 이건 왕사슴벌레가 하는 행동이 아닌데.
관련 행동을 검색을 하자, 대부분의 답변이 사슴벌레가 짝짓기를 한 이후에 암컷이 에너지가 필요하여, 하는 행동이라는 답변이었다. 와우! 이런 경사가!! 사실 내가 바라던 바는, 왕사 한쌍을 키우는 자체도 있었지만, 그들로부터 알을 얻어, 다시 성충까지 키워보는 것이었다. 왕사 커플을 살 때 곤충마트 사장님한테 지금 산란 세팅을 해줘도 되냐고 물었는데, 아직은 기온이 높지 않아 두 달 정도 지난 뒤에 해주라는 말을 들은 터였는데 말이다. 왕사는 산란을 하려면 적어도 기온이 26~28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위적인 페어링(짝짓기)도 없이, 이런 일이...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나는, 인터넷으로 산란세팅을 할 수 있는 준비물들을 샀다. 왕사는 산란을 나무에만 하기 때문에, 산란목을 준비해줘야 한다. 그렇게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고, 왕사 커플을 산란 세팅 해준 곳에 옮기려고 기존 사육통을 열었는데...... 이게 뭐야... 이게 뭐지... 암컷이 두 마리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것도 종이 다른 것이.
기존 사육통을 서비스로 받았는데, 그 통에 이미 암컷 한마리가 살고 있었던 것을 곤충마트 사장님이 모르고 그냥 준 것이다. 이미 그 통 안에 들어있던 암컷은 넓적사슴벌레였는데, 다른 사슴벌레가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한 우리는 당연히 왕사 암컷이 계속 나온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고.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나와서 젤리를 먹고 있던 그 암컷은 기존의 사육통에서 굶주리고 있었던 넓적사슴벌레였던 것... 페어링은 무슨...... 정말 희비가 교차하는 마음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넓사의 출현의 기쁨과 자연 페어링 됐다고 좋아하면서 산란 세팅을 다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
그러나 산란세팅 다 했는데,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왕사는 순하기도 하지만, 커플끼리 다정한 편이어서 같이 사육하는 것만으로도 자연 페어링이 잘 된다고 한다. 그래, 자연의 섭리를 믿어보자. 그냥 넣어보는 거지 뭐.
이렇게 산란 세팅(5월 7일)을 하고 나니, 비가 내려 기온이 더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늘이 안 도우니, 스스로 도와야 하지 않겠나. 사슴벌레를 직업적으로 키우는 사람들의 팁을 들어보니, 아이스박스에 넣어서 온도를 유지하는 방법도 있었고, 전기장판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래서 로켓 배송의 힘을 빌어 미니 전기장판을 사서, 사육장 밑에 깔았는데, 사육장에 습기만 서리고, 사육장에 붙여놓은 종이 온도계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다가 안에 깔아놓은 톱밥이 썩는 건 아닐까. 이건 패스.
핫팩을 이용해볼까. 그리고 사육장을 박스에 넣고 양쪽에 붙이는 핫팩을 붙이니, 와우... 온도계의 색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뒤로 지금까지 왕사 커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다만 젤리가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깔아놓은 톱밥의 모양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잘 살고 있구나 생각할 뿐이다. 산란 해체는 두 달 정도 뒤. 너무너무 기대된다.
넓적사슴벌레 암컷은 잘 있냐고? 물론이다. 왕사 커플과 떨어뜨려놓은 첫날만 젤리 근처에 나타나지도 않더니, 다시 활발해졌다. 다만, 그때처럼 많이 먹지는 않는다. 이제는 채울 만큼은 채워진 상태인가 보다. 조금 있다 이 암컷에게도 남자 친구를 만들어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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