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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혼자가 된다는 것. 도리스 레싱 단편선 <19호실로 가다>

나에대한열정 2021. 7. 6.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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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 단편선 <19호실로 가다> 

 

이 책 자체는 단편선이라 11편의 단편들을 품고 있다. 그 중 이 포스팅에서는 <19호실로 가다>라는 소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첫 문장: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롤링스 부부의 결혼생활은 지성에 발목을 붙잡혔다.

 

런던의 대형 신문사 차장급 기자인 매슈 롤링스와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수전.

둘은 배울만큼 배웠고, 벌이도 좋은 일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고 옳은 길만을 선택하는 감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커플이 되었고, 가정을 이루었다. 정원이 딸린 집을 구입하고, 네 아이를 낳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수전과 매슈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엄마가 필요하다는 데 서로 동의를 하고, 네 아이가 일정한 나이가 된 후에 수전은 다시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슈가 파티에 가서 어떤 아가씨를 집에 데려다 주는 길에 함께 자고 왔다는 고백을 한다. 수전은 당연히 용서를 했고, 오히려 매력적이고 남자다운 매슈가 여자들에게 유혹받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느낀다. 오다가다 만난 그 여자들이 결혼생활을 건드리지는 못한다는 것. 그럼에도 수전은 인생이 사막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지성은 계속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매슈가 간혹 달콤한 오후를 보낸다 한들, 그것이 뭐 별거라고. 수전은 자기들이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매슈의 바람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막내 아이까지 곧 학교에 들어가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수전에게는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질 터였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제 학기 중에는 매일 그 큰집에 혼자 있을 수 있었다. 날마다 요리와 청소를 해주러 오는 파크스 부인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예측하지 못한 일이 생기게 된다. 막상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오니, 온전히 혼자여서 좋아야 할 것 같은 시간에 오히려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을 발견한다. 안 하던 바느질을 하고 있고, 사 먹으면 되는 케이크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몇 시에는 어디에 전화를 하고, 몇 시에는 무엇을 하고... 매일 어느 정도의 자유가 주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전혀 자유롭지 못한 것에 분노하게 된다. 매슈에게 이야기를 해도 이해하지 못할 거 같다. 수전은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 나선다. 열차를 타고 나가서, 작은 호텔들 중에 '프레드 호텔'이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그동안 수전은 온전한 자유를 느낀다. 그리고 일주일에 다섯 번씩 이곳에서 자유를 갖기 시작한다. 매일 같은 방, 19호실에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매슈는 진지하게 묻는다. 이혼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냐고. 그녀에게 애인이 생겨서 낮에 계속 나가서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매슈는 정말로 애인이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상황을 더 받아들이기 힘들테니까 말이다. 다음 날 호텔에 간 수전은 누군가 자기를 찾았냐는 것을 확인했고, 남편이 누군가 시켜서 자신이 그곳에 매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부터 수전으로 그 방에서 느끼던 평화를 느낄 수가 없었다. 며칠 뒤 다시 5파운드를 주는 매슈에게, 수전은 "내가 있는 곳을 당신이 알아낸 순간부터 그건 의미 없는 일이 됐어."라며 돈을 돌려준다. 다만 걱정이 되어서 그랬다는 매슈. 수전은 매슈에게 있지도 않는 남자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밤새 자신의 생각을 정리 한 것인지 매슈는 수전에게 더블데이트를 제안한다. 요즘에 그 남자가 여기에 없어서 안 되겠다고 돌려 말하는 수전. 하지만 속으로는 남편과 자신 두 사람 모두에 대해 경악하게 된다. 그녀에게는 애인이라는 짐이 생겼고, 매수도 바람을 피우고 있고.

 

그녀는 다시 19호실을 찾아간다. 그리고 카펫을 문쪽으로 밀고, 창문이 잘 닫혔는지 확인하고, 벽난로 미터기에 2실링을 넣고 가스 밸브를 열었다. 그리고 똑바로 누웠다. 가스가 방 안으로, 그녀의 허파 안으로, 뇌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p. 281
오히려 두 사람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생활을 고통스럽고 폭발하기 쉬운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는 데에 지성을 동원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교훈을 얻은 것이다. 주위에는 결혼생활이 파탄 난 사람들, 서로를 괴롭히면서 함께 사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절대로 이런 사람들과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절대로.

 

 

p. 283
수전과 매슈는 모두 아는 것이 많고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폭풍과 모래 구덩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문제도 없었다. 모든 것이 질서있게 잘 굴러갔다. 그래, 모든 것이 그들의 손안에 있었다. 그러니 두 사람이 삶을 건조하고 단조롭게 느낀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두 사람처럼 수많은 책을 읽은 사람들은 지적인 결혼 생활의 뚜렷한 특징인 건조하고 통제된 동경에 대해서도 대체로 준비가 되어있다. 교육 수준이 높고, 안목이 있고, 판단력을 갖춘 두 사람이 자의로 하나가 되어 서로를 위해 유용한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로 하는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고, 심지어 우리 자신도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도 슬픔을 느끼는 것은 수많은 노력이 낳는 결과가 보잘것 없기 때문이다.

 

 

p. 284
하지만 뭔가를 이해한다면 그것을 용서할 수는 없다. 용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는 것이다.

 

 

p. 287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고, 탓할 사람도 없고, 내 잘못이라고 나설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다만 매슈가 원하는 만큼 진정한 기쁨을 느끼지 못했을 뿐, 수전이 위험할 정도로 공허할 때가 늘어났을 뿐. '부정'이라든가 '용서'같은 극적인 단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지성이 그런 단어들을 금지했다. 지성은 싸움, 삐치기, 분노, 속으로 침잠한 침묵, 비난, 눈물도 금지했다. 특히 눈물을 금지했다.

 

 

p. 288~289
그녀는 혼자 힘들게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 아무런 유감이 없었다. 자주 지루해지기는 했다. 어린아이들은 때로 지루한 존재가 되기도 하니까. 피곤할 때도 많았다. 그래도 그녀는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이제 10년만 더 지나면, 그녀는 자기만의 삶이 있는 여성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수전의 본질이 일시정지 상태로 차가운 창고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수전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그녀도 알 수 없었다. 표현이 우스꽝스러운거 같았고, 그녀도 이렇다 할 느낌이 없었다.

 

 

p. 291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외로운 여인이었다. 확실했다. 하지만 그녀는 외롭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적이 가까이 있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정원에 나가는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적의 정체가 짜증이든 초조감이든 공허함이든, 손을 바삐 놀리고 있으면 왠지 적이 덜 위험해 보였다.

 

 

p. 295~296
그래. 그녀에게는 새로운 장소 또는 상황이 필요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그녀는 계속 자신을 일깨워야 할 것이다.

그녀는 (학기 중의 평일에) 매일 일곱 시간씩 주어지는 자유가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에 휩싸였다. 수전은 시간의 압박으로부터, 잊지 말고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단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는 결코 무아의 경지에 빠질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욕실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앉아서,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히려고 애쎴다. 아니면 평소에 비어 있는 여분의 방으로 올라갈 때도 있었다. 그녀가 거기에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p. 299
그녀의 지금 상태가 무엇이든, 그 상태는 가족들과 함께 느끼는 진정한 행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수전은 자신이 비어성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견디며 사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들이 불구가 된 팔, 말 더듬는 버릇, 청력 장애 등을 견디며 사는 것처럼. 수전도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자신의 심리상태를 인정하고 견디며 살아가야 했다.

 

 

p. 306
수전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앞으로 그런 고독한 시간을 더 자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절대적인 고독, 아무도 그녀를 모르고 신경도 쓰지 않는 고독이 필요했다.

 

 

p. 318
이 방에서 수전이 뭘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충분히 쉬고 나면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양팔을 쭉 뻗고 미소를 지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익명의 존재가 된 이 순간이 귀중했다. 여기서 그녀는 네 아이의 어머니, 매수의 아내, 파크스 부인과 소피 트라우브의 고용주인 수전 롤링스가 아니었다. 친구, 교사, 상인 등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수전 롤링스가 아니었다. 정원이 딸린 크고 하얀 집의 안주인도 아니고, 이런저런 행사에 딱 맞게 차려입을 수 있는 다양한 옷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존스 부인이고 혼자였다. 그녀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여러 책임들을 수행한 내가 지금은 여기에 있어.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 똑같아. 하지만 가끔은 매수 롤링스의 아내로서 수행해야 하는 역할들 외에는 내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래. 난 지금 여기에 있어. 만약 다시는 식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난 여기에 있을 거야....... 정말 이상하지! 그녀는 창턱에 몸을 기대고 거리를 내려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느꼈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p. 319
이렇게 고독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하는 것이 쉬우면서도 어려워졌다. 너무 쉬워서 마치 자신이 어머니와 아내를 사칭하는 사기꾼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껍데기만 이리로 옮겨와 식구들과 함께 움직이며 엄마, 어머니, 수전, 롤링스 부인이라는 부름에 응답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자신의 상태를 꿰뚫어보지 못하는 것이 놀라웠다. 가짜라며 쫓아내지 않는 것이 놀라웠다.

 

 

p. 320
일주일에 5일씩 집을 비우고 호텔에 가기로. 거기에 필요한 돈 5파운드는 간단히 매슈에게 요구했다. 그녀가 그가 무엇에 쓸 돈이냐고 물어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돈을 줄 것이다. 확실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예전에는 두 사람이 서로 몹시 가까운 파트너이자 부부여서, 자기들이 꼭 지출해야 하는 돈의 행방을 1실링도 빼놓지 않고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슈는 매주 그녀에게 5파운드를 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딱 그 액수만 요구했다. 단 한 푼도 더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그 돈에 대해 무심한 것 같았다. 마치 그냥 돈을 주고 치워버리려는 것 같았다. 그래, 바로 그런 거였다. 이것을 알아차렸을 때 순간적으로 다시 눈앞이 깜깜해졌지만, 그녀는 버텨냈다. 지금 와서 그런 감정을 느끼기에는 두 사람이 너무 멀리 와버렸다.

 

 

p. 324
그녀는 껍데기 밖으로 끌려나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움츠리는 달팽이처럼, 이 방이라는 피난처로 다시 움츠리고 들어가려고 애쎴다. 하지만 이 방에서 느끼던 평화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되살리려고 애썼다.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갈망했다. 갑자기 약을 빼앗긴 약물중독자처럼 몸이 아팠다. 그녀는 여러 번 그 방으로 다시 돌아와 자아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찾은 것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초조감이었다.

 

 

p. 331
하지만 속으로는 남편과 자신 두 사람 모두에 대한 경악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둘 다 정직한 감정에서 얼마나 바닥까지 떨어져 버린 건지.

 

 

개인적으로 소설을 볼 때에는, 그 속의 인물에 대하여 감정이입은 되더라도 나와는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되어지는게 일반적이었다. 가끔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인물들의 모습이, 내현실에서 나를 기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뭔가 불안 불안한 것이 나를 보고 있는 듯했다. 주인공인 수전을 보고 있는 것인지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했다. 삶이 편하니 허튼생각을 한다고. 또 누군가는 우울증이라고도 했다. 그런데도 난 너무 이해가 된다.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리고 살다가, 정말로 스스로를 온전히 인식하고 싶을 때,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나를 느끼고 싶을 때, 그러한 공간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때로는 그것에서 인해서 드러나는 진실에 욕지기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삶을 놓아버릴 수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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