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나에대한열정 2021. 6. 27.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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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이 시집은 원래 박경리 작가 생전에, 시집 출간을 위해서 60편을 준비하다가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다 채워지지 못했다. 미발표된 시 36편과 현대문학에 기고했던 3편이 같이 수록되어 총 39편의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의 49재에 맞춰 출간된 이 시집은, 더 이상 박경리 작가의 글을 접할 수 없게 된데에 대한 아쉬움과 애석함을 더 진하게 만든다.

 

p. 13
산다는 것 中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p. 15~16
옛날의 그 집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 같이 횡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p. 32~34
천성

남이 싫어하는 짓을 나는 안했다
결벽증,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내가 싫은 일도 나는 하지 않았다
못된 오만과 이기심이었을 것이다

나를 반기지 않는 친척이나 친구 집에는 
발걸음을 끊었다
자식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싫은 일에 대한 병적인 거부는
의지보다 감정이 강하여 어쩔 수 없었다
이 경우 자식들은 예외였다

그와 같은 연고로 
사람 관계가 어려웠고 살기가 힘들었다

만약에 내가
천성을 바꾸어
남이 싫어하는 짓도 하고
내가 싫은 일도 하고
그랬으면 살기가 좀 편안했을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은 훨씬 더 고달팠을 것이며
지레 지쳐서 명줄이 줄었을 것이다

이제 내 인생은 거의 다 가고
감정의 탄력도 느슨해져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무덤덤하며
가진 것이 많다 하기는 어려우나
빚진 것도 빚 받은 것도 없어 홀가분하고
외로움에도 이력이 나서 견딜 만하다

그러나 내 삶이
내 탓만은 아닌 것을 나는 안다
어쩌다가 글 쓰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고도와도 같고 암실과도 같은 공간
그곳이 길이 되어 주었고
스승이 되어 주었고
친구가 되어 나를 지켜주었다

한 가지 변명을 한다면
공개적으로 내지른 싫은 소리 쓴소리,
그거야 글쎄
내 개인적인 일이 아니지 않은가

 

 

p. 88~89
사람의 됨됨이

가난하다고
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
부자라고
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

후함으로 하여
삶이 풍성해지고
인색함으로 하여
삶이 궁색해 보이기도 하는데
생명들은 어쨌거나
서로 나누며 소통하게 돼 있다
그렇게 아니하는 존재는
길가에 굴러 있는
한낱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인색함으로 하여
메마르고 보잘것없는
인생을 더러 보아 왔다
심성이 후하여
넉넉하고 생기에 찬
인생도 더러 보아 왔다

인색함은 검약이 아니다
후함은 낭비가 아니다
인색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낭비하지만
후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준열하게 검약한다

사람 됨됨이에 따라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
후한 사람은 늘 성취감을 맛보지만
인색한 사람은 늘 먹어도 배가 고프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다

 

 

p. 104~105
비밀

사시사철 나는
할 말을 못하여 몸살이 난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며
다만 절실한 것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그 절실한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행복
애정
명예
권력
재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무엇일까
실상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바로 그것이
가장 절실한 것이 아니었을까

가끔
머릿 속이 사막같이 텅 비어 버린다
사물이 아득하게 멀어져 가기도 하고
시간이 
현기증처럼 지나가기도 하고

그게 다
이 세상에 태어난 비밀 때문이 아닐까

 

 

p. 106


육신의 아픈 기억은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덧나기 일쑤이다
떠났다가도 돌아와서
깊은 밤 나를 쳐다보곤 한다
나를 쳐다볼 뿐만 아니라
때론 슬프게 흐느끼고
때론 분노로 떨게 하고
절망을 안겨 주기도 한다
육신의 아픔은 감각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삶의 본질과 닿아 있기 때문일까
그것을 한이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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