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매트 헤이그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The Midnight Library>

나에대한열정 2021. 7. 16.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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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나서 원서로 다시 샀다. 번역이 아닌, 실제 글의 느낌을 알고 싶은 만큼 마음에 드는 소설이다.

 

매트 헤이그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The Midnight Library>

 

첫 문장: 죽기로 결심하기 스물일곱 시간 전, 노라 시드는 낡아 빠진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로 다른 사람들의 행복한 삶을 들여다보며 무슨 일이든 생기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느닷없이, 정말로 일이 생겼다.

 

35살의 노라는 어느 날 갑자기 키우던 고양이가 차에 치여 죽어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다니던 악기점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고, 피아노를 가르치던 집에서 수업을 그만한다는 전화를 받았고, 그나마 약이라도 타다가 갖다 주던 배너지씨에게서도 이제 그만 그 일을 해줘도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불필요해진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죽기로 결심하고 유서를 남긴다.

 

처음에는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안개가 걷히면서 직사각형 형체의 건물이 보였다. 그 앞에는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건물쪽으로 가서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는데, 계속 자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1초도 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니 밖에서는 보이던 창문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사방에 책이 꽂혀 있는 서가였다. 책들은 두께만 다를 뿐 온통 초록색 계열의 책들만 있었다. 오래된 책들 같았지만, 그 안의 공기는 굉장히 신선했다. 복도를 따라 걷다가 방향을 바꾸어도 출구 표시는 어디에도 없었다. 로라는 걸음을 멈추고 책에 다가갔다. 책등에는 제목이나 작가 이름도 없었다. 한 권 뽑아보려고 하는데, 책을 다 빼기도 전에 뒤에서 조심하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노라가 학교 다닐 때에 도서관 사서 선생님이었던 엘름 부인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도서관이다. 자정의 도서관이란다. 죽음은 밖에 있다고 하는데, 그쪽으로 간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네가 죽음에게 가는 게 아니야. 죽음이 널 찾아와야 해.

 

갑자기 서가의 선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름 부인은 이 책들이 노라가 살았을 수도 있는 모든 삶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한다. 선택의 경우만큼 많은 삶이 있다고.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인생이 달리진다고. 

천천히 움직이던 선반이 정지하고 쓰러져 있는 책한권이 보인다. 그건 다른 책들과 달리 초록색 계통이 아니라 회색이었다. 그 책은 노라의 모든 문제의 근원과 해답이 담겨 있는 책이라고 했다. 바로 <후회의 책>

 

책에 적힌 후회들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중요한 것으로 순서가 되어 있었고, 노라가 보고 있는 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또렷한 글씨로 나타났다가 하는 것도 있었다. 그것들은 경우에 따라서 후회가 되거나 아닌 것. 노라에게는 바로 '아이가 없는 것'이었다. 가장 후회가 많은 것은 결혼 직전까지 갔던(노라가 파혼했다) 댄에 대한 부분이었다.

 

댄은 미술사를 전공하고, 프로틴 바 회사의 홍보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언젠가는 시골에서 펍을 운영하겠다고, 노라와 함께 그 꿈을 이루고 싶어 했다.

 

책을 펼쳐서 보고 있으니 한꺼번에 밀려드는 후회들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다. 눈을 감아버리고 엘름부인에게 멈춰달라고 하지만, 엘름 부인은 그건 직접 해야 된다면서 책을 덮으라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삶을 선택하고 싶냐고 묻는다. 그 삶을 살고 싶다고 결정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기억들은 모두 아주 희미해진다고 한다. 노라는 댄과 사귀는 사이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서가의 책들이 움직이다가 멈췄다. 엘름 부인은 책을 한 권 노라에게 주었다. <나의 인생>이라고 쓰여있는.

첫 줄을 읽었더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글씨가 빙글빙글 돌아서 더 이상 읽을 수 없었고, 어느 순간 책도 도서관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모르는 곳에 서있었다. 이런 식으로 노라는 그녀가 살아보고 싶은 삶들을 살아보게 된다. 그곳에서 얼마나 머물게 될지는 모두 노라의 마음에 달려있다. 조금이라도 이 삶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결국 그녀가 선택하게 되는 삶은......

 

p. 32
가게를 나오며 노라는 앞에 여러 개의 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모든 걸 남겨두고 갈 수 있도록.

 

 

p. 37
그걸로 끝이었다. 이제 아무도 그녀는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우주에서 불필요한 존재였다.

 

 

p. 39
그녀는 이번 삶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녀가 둔 모든 수는 실수였고, 모든 결정은 재앙이었으며, 매일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에서 한 걸음씩 떨어졌다.

 

 

p. 59
버트런트 러셀은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생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인생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미 4분의 3이 죽어 있는 상태다."라고 했다. 어쩌면 그게 노라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노라는 그냥 사는 게 두려운 건지 모른다.

 

 

p. 83
전에는 댄의 목소리가 정확히 어땠는지, 댄이 정확히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기억의 속성이다. 대학에 다닐 때 노라는 '홉스 학설로 본 기억과 상상의 원칙'이라는 무미건조한 제목의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 토머스 홉스는 기억과 상상을 거의 같다고 보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노라는 절대 자신의 기억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p. 94
"하고 싶다는 건 재미있는 말이야. 그건 결핍을 의미하지. 가끔씩 그 결핍을 다른 걸로 채워주면 원래 욕구는 완전히 사라져. 어쩌면 넌 무언가를 원한다기보다 무언가가 결핍된 것일지 몰라. 네가 정말로 살고 싶은 삶이 있을 거다"

 

 

p. 100
때로는 살아봐야 배울 수 있으니까.

 

 

p. 123
"이제 알겠지?"
"뭘요?"
"넌 선택은 할 수 있지만 결과까지 선택할 수는 없다는 걸. 하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건 좋은 선택이었어. 단지 결과가 바람직하지 않았을 뿐이지."

 

 

p. 124
어쩌면 자살마저도 너무 활동적인 행위일 것이다. 그냥 둥둥 떠다니며 달리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 변화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인생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인생이 그럴지도 모른다.

 

 

p. 127~128
"사소한 것의 중요성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마라. 그 말을 늘 명심해야 해."

 

 

p. 194~195
자연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살고자 하는 의지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잊어버린다. 경도와 위도가 얼마나 긴지 무감각해진다. 한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광활한지 깨닫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일 거라고 노라는 짐작했다. 하지만 일단 그 광활함을 알아차리고 나면, 무언가로 인해 그 광활함이 드러나면, 당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희망이 생기고 그것은 고집스럽게 당신에게 달라붙는다. 이끼가 바위에 달라붙듯이. 

 

 

p. 199~200
어쩌면 모든 삶이 다 그럴지 모른다. 겉보기에는 아주 흥미진진하거나 가치 있어 보이는 삶조차 결국에는 그런 기분이 들지 모른다. 실망과 단조로움과 마음의 상처와 경쟁만 한가득이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경험은 순간에 끝난다. 어쩌면 그것만이 중요한 의미인지 모른다.

 

 

p. 215
노라는 다중 우주에 대해 읽은 적이 있고, 게슈탈트 심리학에 대해서도 조금 알고 있었다. 인간의 뇌가 세상에 대한 복잡한 지식을 받아들여 단순화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무를 볼 때 우리의 뇌는 이파리와 가지가 복잡하게 얽힌 그 덩어리를 '나무'라는 물체로 해석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매사가 간단하면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계속 단순화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단순화해서 본다는 사실을 노라는 알고 있었다. 인간은 세상을 3차원으로 본다. 그것이 단순화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고 일반화하는 생명체이며,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상태에서 살고, 마음속의 구부러진 길을 편다. 그래서 늘 길을 잃는 것이다.

 

 

p. 218
당신은 어떤 형태의 세상에서든 존재합니다. 그 세상이 아무리 비현실적이라고 해도요. 당신을 제한하는 건 오로지 당신의 상상력뿐입니다. 되돌리고 싶은 결정이 있다면 창조성을 한껏 발휘할 수 있죠.

 

 

p. 221
까뮈의 인용문이 떠올랐다.

"무엇이 날 정말로 재미있게 했는지는 잘 모를 수 있지만, 재미없게 했던 건 확실히 알 수 있다."

 

 

p. 224
"아니, <후회의 책>이 얇아지고 있어. 이제 그 책은 여백이 많아졌단다....... 넌 평생 네 속마음과 다른 말을 하면서 산 것 같구나. 그게 네 장애물이었지."

 

 

p. 257~258
"살다 보면 더 쉬운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상이죠. 하지만 아마 쉬운 길은 없을 거예요. 그냥 여러 길이 있을 뿐이죠.... 매일 매 순간 우리는 새로운 우주로 들어가요. 자신을 타인 그리고 또 다른 자신과 비교하며 삶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죠. 사실 대부분의 삶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공존하는데 말이에요."

 

 

p. 272~273
등거리. 노라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는데도 거의 제자리에 머무는 동안 너무도 중립적이고, 수학적인 그 단어가 강박적인 만트라가 되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등거리. 등거리. 등거리. 어느 쪽 강둑하고도 더 가깝지 않았다. 노라는 평생 그런 느낌으로 살았다. 중간에 끼어서 안간힘을 쓰고, 허우적거리며 그저 살아남으려고 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어느 길에 헌신해야 후회가 없을지 모른 채.

 

 

p. 274
"인생은 언제나 행동하는 거란다."

 

 

p. 276~277
이 도서관에 들어온 이후로 지금까지 노라가 선택했던 삶은 사실 모두 다른 사람의 꿈이었다.

어쩌면 그녀를 위한 완벽한 삶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딘가에 틀림없이 살 가치가 있는 인생이 있을 것이다. 진정으로 살아볼 가치가 있는 인생을 발견하려면 더 큰 그물을 던져야 한다는 걸 노라는 깨달았다. 엘름 부인의 말이 맞았다.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체스판에 말이 남아 있는데 게임을 포기하는 선수는 없다.

 

 

p. 278~279
최상의 결과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약간 실망했던 기억도 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최상의 결과는 '여러 대안 중에서 현명한 선택을 내린 결과'다. 그런데 지금 노라는 이렇게 여러 대안을 조금씩 맛보는 특권을 누리는 처지에 있다. 이는 지혜로 가는 지름길이며 아마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노라에게는 이 기회가 짐이 아니라 소중히 여겨야 할 선물로 보였다.

"체스를 두는 데 올바른 법은 없어. 그저 많은 방법이 있을 뿐이야. 인상과 마찬가지로 체스에서는 가능성이 모든 것의 기본이야. 모든 희망과 꿈, 후회,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의 기본이지."

 

 

p. 302
더 나은 삶을 상상할 수 없을 때만 영원히 그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더 많은 삶을 살아볼수록 더 나은 삶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버리기 힘들다. 새로운 삶을 맛볼 때마다 상상력의 한계가 조금씩 넓어지기 때문이다.

 

 

p. 308
노라는 자신이 삶을 끝내려고 했던 이유가 불행해서가 아니였음을 깨달았다.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우울증의 기본이며 두려움과 절망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지하실로 들어가게 되어 문이 닫힐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반면 절망은 문이 닫히고 잠겨버린 뒤에 느끼는 감정이다.

 

 

p. 364
"모든 삶에는 수백만 개의 결정이 수반된단다. 중요한 결정도 있고, 사소한 결정도 있어. 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때마다 결과는 달라져. 되돌릴 수 없는 변화가 생기고, 이는 더 많은 변화로 이어지지......"

 

 

p. 382~383
노라는 죽고 싶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닌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엉망진창에 고군분투일지라도 그녀의 것이었다. 그조차 아름다웠다.

그리고는 늘 하던 대로 책을 펼치고 첫 장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유일한 차이점은 첫 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책 전체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백지였다. 다른 책처럼 이것 역시 그녀의 미래였다. 하지만 다른 책과 달리 이 책의 미래는 아직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삶이다. 그녀의 본래 삶.
그리고 백지였다.

 

 

p. 389
"절망의 반대편에서 인생은 시작된다"라고 사르트르는 썼다.

 

 

p. 399
"있잖아, 오빠. 인생은 이해하는 게 아니야. 그냥 사는 거야"

 

 

소설을 따라가면서 처음에는 내가 노라가 된 듯, 나라면 어떤 삶을 선택할까 즐거운 상상을 함께 했다. 정말 저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선택을 제일 하고 싶은지 말이다. 사실, 나는 항상 떠올리는 특정시기가 있었는데, 곰곰이 인생을 되돌아보니 생각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에, 의외로 이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참으로 곳곳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면 갈수록, 상상만큼 되돌아가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이 단순한 게 아니라고 여겨졌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무언가 현실에서 부족해서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것 역시 아니었다. 내가 이 삶을 선택하지 않고 다른 삶으로 가기에는 내가 이 삶에 애착을 느끼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특히 내 아이들. 그 아이들이 없는 세상으로 간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알 수 없는 울컥거림이 책의 끝에 있었다.

 

나는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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