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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잉그리트 폰 욀하펜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

나에대한열정 2021. 7. 31.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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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벤스보른 프로젝트'가 지운 나의 뿌리를 찾아서.

잉그리트 폰 욀하펜, 팀 테이트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

 

1942년 8월 그날 아침, 독일에게 점령된 유고슬라비아 첼예의 학교 운동장에 1,262명이 모여있었다. 건강 진단을 위해 아이들을 학교로 데려오라는 새로운 독일 통치자의 명령을 받고 소집되었다.

가족의 수를 센 뒤 사람들을 아이, 여자, 남자로 나누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걸음마를 막 뗀 아이들도 부모들로부터 떨어져 검사를 받았다. 힘러가 진정한 독일 혈통의 특징으로 정해놓은 엄격한 용모 기준에 부합하는 아이들은 1, 2등급에 배정되었다. 이들은 제3제국의 인구로 충원될 만한 쓸모 있는 아이들로 공식 등록되었고, 반면에 슬라브인의 특징이나 흔적이 조금이라도 보이거나 유대 혈통의 특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낮은 인종 등급인 3, 4급에 배정되었다. 그렇게 '열등 인종'으로 분류된 아이들은 장차 나치 정권을 위한 노예 노동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였다.

1942년 9월 심화선별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힘러가 '좋은 피'를 보존하고 충원할 목적으로 설립한 수많은 단체의 일원인 전문 '인종 검사관'들이 아이들을 선별했다. 아이들의 코 길이를 재어 이상적이라고 공식 인정된 코의 형태와 비교하고, 입술과 치아, 엉덩이, 생식기도 찔러보고 사진을 찍으며 소중한 유전자를 가진 인간 알곡과 덜 소중한 쭉정이로 분류했다. 3, 4급으로 재분류된 나이 많은 아이들은 나치 독일의 심장부인 바이에른을 지나 재교육 수용소로 끌려갔다. 1, 2급으로 분류된 아이들 가운데 상위의 어린아이들은 머지않아 친위대장 힘러가 직접 운영하는 비밀 프로젝트로 넘겨졌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레벤스보른'이었다. 레벤스보른에 배정된 아이들 가운데에 9개월 된 에리카 마트코가 있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점령지로 나누어지게 된다. 같은 독일인이라도 어느 지역에 있었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졌다. 이 글을 쓴 잉그리트는 당시 3살, 할머니와 엄마, 남동생과 살고 있었고, 아빠는 다른 지역에 있었다. 엄마와 살고 있던 지역은 소련의 통치하에, 아빠가 있던 곳은 미국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네 점령지를 통행하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되었다. 엄마는 다른 가족들이 머무르고 있는 영국점령지로 탈출을 감행했고,소련점령지에서 덜 위험한 영국점령지로 빠져나오자마자 두 남매를 보육원에 맡겨버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6년의 시간을 보낸다. 10살때 가족에게 돌아가지만, 엄마가 아닌 아빠와 살게 된다. 그러던 중, 병원에 갔다가 잉그리트 자신의 이름이 에리카 마트코라는 이름으로 써있는 것을 보게 되고, 자신이 친부모라고 알아왔던 사람들이 '위탁부모'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찾기 시작하는데...

 

p. 32
독일로 진군해온 소련 군대가 무엇보다 능숙하게 사용한 독일어가 있었다. '콤, 프라우(komm, Frau, 이리와 여자)' 어떤 불복종도 허용하지 않는 명령이자 피할 수 없는 결과가 예정된 명령이었다. 수만 명의 독일 여성이, 어쩌면 그 열 배가 되는 독일 여성이 히틀러가 러시아의 도시와 주민에게 저지른 끔찍한 잔혹 행위의 대가를 자신들의 몸으로 치렀다. 소련 점령지에서 강간은 흔한 일이 되어버려서 나이를 불문한 많은 여성에게 성폭행 여부는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나 여러 번'당했는지가 문제였다.

 

 

p. 137
충격이 차츰 진정되자 나는 이 조사 과정이 내게 미친 영향을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조사 결과에 따라 1년 내내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한순간 높이 날아올랐다가 다음 순간 곤두박질쳤다. 정말 이런 고통을 감내할 가치가 있을까? 내 진짜 정체성이 무엇이든 나는 잉그리트 폰 욀하펜으로 괜찮은 삶을 살고 있었다. 성공적이고 대체로 행복한 삶이었다. 그리고 내가 잉그리트임을 증명하는 공식 서류도 갖고 있다. 내가 한때 에리카 마트코라고 불렸는지, 아닌지가 그렇게 중요할까? 마트코 가족과 이 에리카라는 사람이 인생을 출발했던 나라의 수수께끼를 계속 풀어간다면 내가 더 행복해질까?

 

 

p. 155~156
노르웨이는 히틀러의 군대가 점령한 최북단 국가였다. 독일군이 1940년 4월 노르웨이를 침략했고, 그때부터 제2차 셰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치의 명령을 열성적으로 따르는 부역 정부가 노르웨이를 관리했다.
힘러는 금발에 파란 눈을 지닌 노르웨이 주민들을 사실상 아리아인이나 다름없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힘러와 그의 관료들은 친위대나 독일군에게 노르웨이 여성들과 혼외관계를 맺으라고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그리고 노르웨이에 레벤스보른 시설을 세워 그곳에서 태어난 아기들을 다시 제3제국으로 데려와 적합한 부모에게 입양시키거나 위탁했다. 이런 부역의 유산은 오래도록 씁쓸하게 남았다. 독일 곳곳의 레벤스보른 시설 직원들이 다급하게 자료를 폐기한 것과 달리, 노르웨이에서 친위대는 문서를 파괴하기 못했다. 그 걸과, 전쟁 후 레벤스보른 산모와 아이 수천 명의 신원이 드러났고 동포들의 분노를 샀다. 이 여성과 아이들은 이웃과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경찰은 독일 병사와 관계한 3,000~5,000명을 체포해 강제수용소까지 행진하게 했다. 노르웨이 최대의 정신병원장은 독일인과 관계한 여성들은 '정신적 하자가 있는 자들'이며, 그들의 자녀 가운데 80퍼센트가 발달 지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p. 158~159
1941년 무렵 전쟁은 한 주에 독일인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레벤스보른 프로젝트로 그 공백을 매우길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힘러는 새로운 전략을 세웠다. 군대와 관료들에게 그들이 지배하는 나라들에서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아이들을 납치하라고 비밀 지시를 내렸다.
어린이 대량 납치, 이게 사실일까? 충격적이지만 사실이었다. 힘러가 사석에서 친위대 장교들에게 이 계획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연설이 녹음된 자료까지 있다.
"이들 속에 우리 종족의 좋은 혈통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거두어들일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아이들을 훔쳐 이곳으로 데려올 것입니다."
이 계획에 붙여진 이름이 '독일화'였다. 내 문서에 있었지만, 내가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바로 그 단어였다.

 

 

p. 161
폴커의 조사로 드러난 또 하나의 사실은 납치되어 레벤스보른 시설로 이송된 외국 아기들에게 레벤스보른이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고 그들이 독일 고아이거나 재외 거주 아리아인, 곧 민족독일인아이라는 거짓 중명서를 발행하곤 했다는 것이다. 다시 내가 아는 단어가 등장했다. 내가 엄마의 방을 정리할 때 발견한 문서에 있던 단어였다.

 

 

p. 169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외국 아이들을 납치할 대규모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 계획은 적국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독일 인구를 늘리려는 이중 목적을 가졌다. 또한 점령국에 보복과 위협을 가하는 수단으로도 쓰였다. 전쟁 기간 중 수많은 체코와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노르웨이 아이들을 부모나 보호자에게서 빼앗아 그들의 '인종적 가치'에 따라 분류했다.

 

 

p. 174
법정 기록에는 힘러가 나치의 인종적 '가치'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폴란드 가족들의 처리 방법을 지시한 내용도 있었다.

"부른힐드 무진스키는 보호감호에 취해질 것이다. 네 살, 일곱 살 인 두 아이는 불임수술 뒤 어딘가의 위탁가정에 맡겨질 것이다. 잉게보르크 폰 아베나리우스도 보호감호에 취해질 것이다. 그녀의 자녀들도 불임수술 뒤 위탁가정에 맡겨질 것이다."

 

 

p. 203
나는 자우어브룬 출신의 에리카 마트코가 분명했다. 이 소식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나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는 채 살아본 적이 없다면 그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건 마치 해방된 느낌이었다. 60년 동안 나를 짓누르던 짐이 사라진 것 같았다.

 

 

p. 206~207
'레벤스푸렌'이라는 모임의 이름은 '레벤스보른'을 의도적으로 비튼 것이다. 힘러의 레벤스보른은 '행명의 원천'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행명의 흔적'이라는 뜻의 레벤스푸렌은 말 그대로 생존자들이 자신들의 흔적을 찾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모임의 이름에는 미묘한 말장난도 들어 있다. 가운데 음적 '푸르(pur)'는 우리의 모든 문제의 근원인 인종적 순수성(purity)에 대한 나치의 집착을 암시한다. 우리는 단체의 정관 머리글로 특별한 글을 인용했다.

"단연코 뿌리뽑힘은 인가 사회가 경험하는 가장 위험한 병폐다. 뿌리 뽑힌 사람은 누구든 다른 사람의 뿌리를 뽑는다. 뿌리내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뿌리를 뽑지 않는다. 어쩌면 뿌리내림은 가장 중요하면서 간과되는 인간 영혼의 욕구다."

이 인용문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활동가 시몬 베유의 글이다. 그녀는 1930년대 초 독일에서 파시즘과 싸웠고 나중에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국 편에서 싸웠다. 1943년 그녀는 <뿌리내림>이라는 책을 써서 서구 사회를 약화시키는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문제를 들여다봤다. 우리가 선택한 이 인용문은 우리 삶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요약한 것이었다.

 

 

p. 216
수치심, 새로운 우수 인종을 창조한다는 힘러의 계획에 포함되었던 많은 사람의 삶에 그늘을 드리우는 단어였다.

 

 

p. 218~219
노르웨이는 점령 독일군에 대한 증오심으로 레벤스보른 시설에서 태어난 아이 8000여 명을 차별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이 아이들을 모두 독일로 보내려 했으나, 그 계획이 실패하자 아이들을 정신병원이나 보육원에 감금했다. 기젤라는 레벤스보른 아이들을 이처럼 증오하고 박해한 원인이 나치에 점령당했던 노르웨이 사람들의 죄책감과 지도자들이 나치에 부역했다는 수치심, 그리고 무엇보다 레벤스보른이 '친위대 종축장'이라는 터무니없는 소문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2000년대 초 노르웨이 정부는 이 같은 정책 실패로 인한 레벤스보른 출신의 희생자들에게 1인당 2만 4,000유로씩 조용히 배상했다.

 

 

p. 245
타냐와 루드비그를 돌려받았을 때 헬레나는 아마 셋째 아이가 사라졌다고 호소했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어쩌면 그녀를 달래려고, 아니면 그들도 남겨진 아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부모 없는 아기를 그녀에게 건네줬는지 모른다. 그 여자 아기가 에리카 마트코로 자랐다.
나는 고통과 분노, 혼란을 동시에 느꼈다. 어머니는 분명 그녀의 팔에 떠맡겨진 아기가 자기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생김새도, 냄새도 달랐을 것이다. 어떻게 그녀는 그 터무니없는 대체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그녀가 겁에 질려서 독일군에 따지지 못했을 거라는 것이다. 총살형을 집행하는 소리가 들리는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과 남편과 아이들의 목숨을 걱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이해한다고 해도 감정은 별개였다.

 

 

p. 248
기젤라는 이상한 양면성으로 나를 대했다. 나를 보육원에 보낸 그녀가 사랑이 가득한 따뜻한 가정에서 아이를 키우겠다고 약속한 사람으로 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그녀는 회피와 기만으로 진짜 정체성을 찾으려는 나의 탐색을 방해했다. 그녀가 내 태생에 대해 알려만 줬어도 내 삶이 얼마나 순탄했을까? 레벤스푸렌에서 만난 친구들을 보면 레벤스보른 아이를 위탁양육한 어머니 중에는 아이의 태생을 터놓고 정직하게 말한 사람도 있었다. 이런 정직함은 아이의 불안을 더러 달래주기도 했다. 왜 엄마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을까?

 

 

p. 263~264
여러 해 동안 나는 찾을 수 없는 것을 찾느라 내 삶에 그늘을 드리웠다. 우리 모두에게는 원하는 것과 가질 수 있는 것 사이의 틈이 있다. 그리고 그 틈에는 회한이 무성하게 자란다. 나는 꿈과 현실 사이, 실망스러운 무인 지대에 오래 갇혀 있었다. 나는 우리가 태생의 조건이 아니라 살아가는 내내 우리가 내리는 선택으로 정의된다는 근본적인 진실을 보지 못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너 자신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을 위해 너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이해하는 데 평생이 걸렸다. 하지만 내가 출발한 바로 그곳으로 되돌아 왔다 해도 이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 진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제 내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누구인지 안다. 에리카 마트코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훔쳐 온 레벤스보른 아이였고, 레벤스보른의 광기 속으로 사라졌다. 잉그리트 폰 욀하펜은 독일 여자이고 여러 어린이를 돕고 위로한 물리치료사다.
나는 한때 유고슬라비아 출신 에리카 마트코였고, 독일인 잉그리트 폰 욀하펜이었다. 둘 다 나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잉그리드 마트코 폰 욀하펜이다. 그게 항상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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