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끄적임) 인생은, 아니 부부간의 관계는 계절을 닮았다.

나에대한열정 2021. 11. 17.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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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만 해도 아이랑 학교 가는 길에,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은행나무를 보며 왜 아직도 노랗게 안되냐고 걱정(?)을 했었다. 다른 나무들은 벌써 색이 바뀌고, 심지어 잎사귀들이 제대로 안 남아 있는 것도 있는데, 왜 저 은행나무는 색도 안 변하냐고 말이다. 그런데 비가 오고 날씨가 좀 쌀쌀해지더니, 조금씩 노란 잎들이 보였다. 그러더니 어느새 이렇게 황금길을 쏟아놓는다. 역시 자연은 걱정할 대상이 아니었다. 알아서 살아갈 것을......

 

요즘은 계절탓인지, 계절처럼 물들고 있는 나이 탓인지, 삶을 조금은 뒤돌아보게 된다. 후회라는 것을 하는 성격은 못되는데, 굳이 표현하자면 성숙하지 못해서 부드러울 수 없었던 시기를 말이다. 

 

동갑내기 옆지기와는 1년남짓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분명 난 독신주의자였는데, 어떻게 결혼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왜 생각이 나지 않을까.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라이프스타일도 다르고, 어느 하나 비슷한 게 없는데 어느 포인트에서 결혼이라는 걸 생각하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정확하게 하나 기억하고 있는 게 있다면, 내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아빠가 될 수 있는 남자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왜 과거형이냐고? 막상 같이 살다 보니, 큰아들을 키우는 기분이랄까...

 

신혼초에는 내가 서재에 있으면 10분도 되지 않아, 내 등뒤에 서있었다. "책이 나보다 좋아?" 이게 무슨 유치한 질문인가. 그런데 그 유치한 질문이 신경전을 벌이는 발단이 되었다. 난 책 읽을 때 누가 말 시키는 걸 정말로 싫어한다. 그런데 옆지기는 그걸 모르니 계속 건드리고. 그걸 말해도 이해를 못 하고. 자기가 퇴근하고 오면 같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도 보고 그러면 안 되겠냐고 했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나로서는 그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결국은 텔레비전을 보는 옆지기 옆에 앉아서 책을 보는 걸로 타협을 했다. 살다 보니, 이렇게 타협이 되는 것도 있었지만, 어떤 부분들은 포기하지 않으면 상대의 손을 놓아야 되는 상황일 때도 있었다. 

 

한바탕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끄트러미에 남아있는 마음은, '네가 나가서 일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네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게 내가 다 알아서 하고 있기 때문이야'라는 일종의 앙금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내 안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원하는 책들과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상황을 유지해줘서 옆지기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객관적인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늘 언제나 내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하는 마음이 바뀐 것이다. 혼자였으면 더 자유롭게 누렸을 것들이라고,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감사한 일이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참 많은 것이 변했다. 옆지기를 대하는 것도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어졌고, 그로 인해 돌아오는 반응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마음의 변화는 부부간의 관계만 변화시킨 게 아니다. 내 삶의 행복지수를 올려놓았다. 생각은 한끗 차이인듯한데, 그로 인한 변화는 너무나 컸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조금만 더 성숙했다면, 조금 더 상대에게 부드러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다행이지 않은가.

 

살다 보니, 인생살이가 계절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결혼생활이라고 해야 하나. 처음에는 연둣빛 잎이 돋아나는 것만으로도 싱그러운 시기여서, 무엇을 해도 이뻐 보이는 봄 같은 시기를 지낸다. 그러다 태양이 뜨거워지면 그것을 피하려 여기저기를 찾게 되고, 끈적거리는 것이 싫어 옆에 누군가 함께 하는 것이 거추장스러워진다. 그래서 가까이하기에 힘든 시기들이 있다. 그런 여름과 같은 관계가 시들해지면, 다음 해를 다시 풍성하게 살아내기 위해 자신의 잎사귀들을 물들이고 떨어뜨리는 나무들처럼, 겉은 좀 더 예쁘게 물들고, 속은 내실을 기하게 된다. 그리고 바람이 서늘해지기 시작하고, 옷을 여미어야 하는 겨울이 오면, 그때는 서로 맞잡고 보듬어주어야 서로의 온기로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시기도, 내 인생도 비슷하게 가을이다. 이렇게 이쁘게 물들다가, 보듬어 줄 시간만 남게 되겠구나.

인생은, 꽤 살만하다. 그리고 제법 근사하다.

천상병시인의 <귀천>의 끝부분은 제대로 인 것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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