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끄적임) 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나에대한열정 2021. 11. 15.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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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한 자루가 왔다.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한솥을 삶아놓고 껍질을 벗긴다. 이 생각 저 생각 사이로, 예쁜 밤알들이 나온다.

그리고 밤을 좋아했던 누군가도 같이 나온다.

 

혼자만의 글을 쓰는 공간이 있다. 그곳에는 마치 비밀일기처럼 아무에게도 내뱉지 못하고 쏟아놓는 글들이 있다. 내가 직접 써놓은 글도 있고, 누군가 나에게 써주거나 보낸 글들도 있다. 잊지 않기 위해서 남겨놓은 글들도 있고, 떠나보내기 싫어 지우지 못한 글들도 있다.

 

어느 순간 이후로는 잠시 머물다가 빠져나오기만 하고, 더 이상 기록되지 않는 공간. 간간이 들려, 지우고 싶은 기억들을 지워나가는 공간. 그렇게 마음을 매듭짓고 다독거리는 그런 곳.

 

이상하게 이 계절을 더 시리게 만드는 누군가의 글속에 끼워져 있던 노희경 씨의 글.

이 글로 시작되었던 한 만남이 있었다. 

 

 

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자 모두 유죄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 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나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음 물 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 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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