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나에대한열정 2021. 12. 30.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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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p. 36~37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 만나러 가느라 서둘렀던 적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
도착하지 않은 당신을 기다린 적 있습니다.
멀리서 온 편지 뜯듯 손가락 떨리고
걸어오는 사람들이 다 당신처럼 보여
여기에요, 여기에요, 손짓한 적 있습니다.
차츰 어둠이 어깨 위로 쌓였지만
오리라 믿었던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입니다.
어차피 삶 또한 그런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오지 않듯
인생은 지킬 수 없는 약속 같을 뿐
사랑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실망 위로 또 다른 실망이 겹쳐지며
체념을 배웁니다.
잦은 실망과 때늦은 후회.
부서진 사랑 때문에 겪는
아픔 또한 아득해질 무렵
비로소 깨닫습니다.
왜 기다렸던 사람이 오지 않았는지,
갈망하면서도 왜 아무것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지,
사랑은 기다림만큼 더디 오는 법
다시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나갑니다.

 

 

p. 46~47
새들도 슬픔이 있을까

하늘에 뿌려놓은 새의 발자국,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사람 있어
안개꽃 다발을 흔든다.
지겹도록 떨어지는 링거 한 방울,
병실엔 침묵이
바깥엔 채 이별이 도착하지 않았다.

아침녁에 꺼내놓는 시리고 찬 이름 하나,
보낼까 말까 망설이는 편지의 모서리가
주머니 밖으로 하얗게 손가락 내밀고 있다.
시린 입김 올리며
쓸쓸한 날엔 철길을 걷는다.
연기 흩어진 하늘을 떼 지어 날아가는 새 떼.
강을 건너가는 햇빛의 발이 
꽁꽁 얼어 애처롭다.
새들도 슬픔이 있을까.
가갸거겨, 소리내면 흩어지는
무수한 저 글자들도 사연을 있을까.

추락하는 이름 위에 앉아본다.
내가 사랑에 실패하는 건 다만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p. 57
세월

살아가다 한번씩 생각나는 사람으로 살자.
먼 길을 걸어 가 닿을 곳 아예 없어도
기다리는 사람 있는 듯 그렇게
마음의 젖은 자리 외면하며 살자.
다가오는 시간은 언제나 지나갔던 세월,
먼 바다의 끝이 선 자리로 이어지듯
아쉬운 이별 끝에 지겨운 만남이 있듯
모르는 척 그저 뭉개어진 마음으로 살자.

 

 

p. 61
눈 오는 밤

편지를 쓴다.
모처럼 하얀 종이 위에 써보는 편지.
사각거리며 걸어가는 연필심 따라
어디선가 환하게 눈 내린다.
미끄러지는 사람 있는지
까르르 입을 막는 여자의 웃음소리 들린다.
검은 세상의 하얀 약속들.
누가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간에 몸을 담그는 거라
너는 가르쳐주었다.
어느새 눈 그치고
사각거리던 편지도 마침표에 닿는다.
지치도록 걸어가도 집이 보이지 않던
젊은 날의 시간
아무도 몸 담그지 않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편지의 말미에 얼른
여전히 사랑을 믿지 않는다 추신한다.

 

 

p. 62~63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보라.
-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伴侶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넣고
떠나라.

 

 

p. 98~99
비상

잠들지 마라 내 영혼아.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연 농아처럼
하염없는 길을 걸어 비로소 빛에 닿는
생래生來의 저 맹인처럼
살아 있는 것은 저마다의 빛깔로
부시시 부시시 눈부실 때 있다.
우리가 일어서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넘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내다버리고 싶어도 버리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이 인생.
덫에 치어 버둥거리기만 하는
짐승의 몸부림을 나는 이제
삶이라 부르지 않겠다.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숨막힘.
사방으로 포위된 무관심 속으로 내가 간다.
단순히
우리가 일어서지 못하는 것은
넘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넘어진 것들이 일어서지 못하는 것은 그렇듯
넘어짐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일으켜 세우는 자 없어도 때가 되면
넘어진 자들은 스스로 일어나는 법.
잠들지 마라 내 영혼아.
바닥에 닿은 이마 들어 지평선 위로
어젯밤 날개를 다쳤던 한 마리 새가
힘겹게 날아오는 모습을 보아라.

 

 

p. 142~143
한 여자가 있었네

사막의 별,
바람,
모래,
졸졸대며 머리 속을 흘러가는 시냇물

누군가 내 머리 속에
퐁당거리는 돌 던진다.
갑작스레 발목 적시는 내 마음의 오아시스
누구나 마음속에 여자 하나 지니고 산다.

오렌지 같은 여자,
사탕 같은 여자,
더러는 사막의 별 같은 여자,
가던 걸음 멈춰 돌아다보면
하얗게 피는
그리움 같은 여자.

종이배,
반달,
분꽃,
접다가 만 색종이.

내 마음의 별,
손가락 사이로 은빛 모래알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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