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나에대한열정 2021. 12. 31.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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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2021

 

올해 알게 된, 멋진 시인이다.

얼핏 읽으면 이게 뭔가 싶다가도, 다시 읽으면 머리에 진동이 울린다. 좋다.

 

p. 12~13
소동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버릴까? 중얼거리자
젖은 개가 눈앞에서 몸을 턴다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물방울들

저 개는 살아 있다고 말하기 위해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길 즐긴다

 

 

p. 16~17
업힌

산책 가기 싫어서 죽은 척하는 강아지를 봤어

애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
나는 돌이다, 나는 돌이다 중얼거리는 하루

이대로 입이 지워져버렸으면, 싶다가도
무당벌레의 무늬는 탐이 나서
공중을 떠도는 먼지들의 저공비행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는 하루

생각으로 짓는 죄가 사람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을까
이해받고 용서받기 위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대치란 무엇일까

화면 속 강아지는 여전히 죽은 척하고 있다
꼬리를 툭 건드려도 미동이 없다

미동, 그러니까 미동
불을 켜지 않은 식탁에서 밥을 물에 말아 먹는 일
이 나뭇잎에서 저 나뭇잎으로 옮겨가는 애벌레처럼
그저 하루를 갉아 먹는 것이 최선인

살아 있음,
나는 최선을 다 해 산 척을 하는 것 같다
실패하지 않은 내가 남아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애벌레는 무사히 무당벌레가 될 수 있을까
무당벌레는 자신의 무늬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예쁜 걸 곁에 두면 예뻐질 줄 알고
책장 위에 차곡차곡 모아온 것들

나무를 깎아 만든 부엉이, 퀼트로 된 세 인형, 엽서 속 검은 고양이, 한쌍의 천사 조각상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순간이 있다
나는 자주 그게 끔찍해 보인다

 

 

p. 26~27
선잠

그는 나의 잠 속까지 따라왔다 신발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밤마다 어딜 그렇게 다니는 거에요 물어도 겨울을 나기 위해선 장작이 더 필요하다고만 말한다

장작은 이미 충분해도 생각만큼 겨울이 긴 것도 아니고요 
나는 따뜻한 차를 내주었다 그가 몸을 좀 녹였으면 했다

그를 녹이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그는 텅 비어 보인다 한모금 한모금 마실 때마다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그가

녹는다 식탁 위엔 덩그러니 찻잔만 남아 있다

나는 깨어 있는 사람인가요 잘 깨어 있는 사람인가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철로의 입장에서 보면 기차는 무서운 반복일 뿐이에요 말한다

낮게 나는 새들이 있고 그보다 낮을 수 없는 마음이 있고

누군가 나를 흔드는 것 같다

밤새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주었노라고
돌아오지 못할까봐 겁이 났었노라고

 

 

p. 32
연루

당신에게는 사슴 한마리가 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사슴은 오래전 당신을 찾아왔고 당신 곁에서 죽을 것이다

사슴은 색이 없고 무게가 없지만 자주 붉은 사슴이 되고
며칠씩 사라졌다 돌아올 때가 많다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 같다

오늘도 사슴은 홀로 잡목 숲을 떠돌고 있었다 숲에는 하염없이 비가 내렸고
이윽고 사슴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 먼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쇠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곳에 무언가 있다는 듯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그순간 당신은 비에 대한 낯선 기억 하나를 갖게 된다
소매엔 까닭 모를 흙이 묻어 있다

덫에 걸린 사슴의 발이 검게 썩어들어갈 때
당신은 수없이 지나다니던 방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붉을 대로 붉어진 사슴이 절뚝이며 당신에게로 돌아올 때
당신은 수백개의 신발이 강물에 떠내려오는 꿈을 꾼다

당신이 잠에서 깨어날 때 사슴은 빛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아침 햇빛을 보면 자주 무릎이 꺾인다 자꾸만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p. 36~37
사랑의 형태

버리려고 던진 원반을 기어코 물어 온다
쓰다듬어달라는 눈빛으로
숨을 헐떡이며 꼬리를 흔드는

저것은 개가 아니다
개의 형상을 하고 있대도 개는 아니다

자주 물가에 있다
때로는 덤불 속에서 발견된다

작고 노란 꽃 앞에 쪼그려 앉아
다신 그러지 않을게, 다신 그러지 않을게
울먹이며 돌아보는

슬픔에 가까워 보이지만 슬픔은 아니다
온몸이 잠길 때도 있지만
겨우 발목을 찰랑거리다 돌아갈 때도 있다

물풀 사이에 숨은 물고기처럼
도망쳤어도 어쩔 수 없이 은빛 비늘을 들키는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 자신했는데
이름을 듣는 순가 그래도 풀려버리는

깊은 바닷속 잠수함의 모터가 멈추고
눈 위에 찍힌 발자국들이 소리 없이 사라진다

냄비 바닥이 까맣게 타도록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등 위에 있는
이 모든 것 

 

 

p. 45~47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었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 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p. 64
단란

모두들 바늘구멍을 보고 있다. 각자의 낙타를 데리고 어떻게 그곳을 통과할지에 대해.

첫번째 사람은 말했다. 필요한 것은 시간이라고, 그는 바늘구멍이 잘 보이는 곳에 작은 움막을 짓기 시작했다. 말뚝에 묶인 낙타가 큰 눈을 끔뻑거렸다.

두번째 사람은 말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그는 흰 접시에 붉은 토마토 한알을 올리듯 낙타를 제단으로 데려갔다. 킬도 불도 장작도 모든 것이 충분했지만 정작 마음은 먹을 수 없었다.

세번째 사람은 말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농담이라고. 그는 자신의 낙타에게 나비 탈을 씌워놓았다. 가끔 낙타는 자신이 나비인 줄 알고 팔랑팔랑 날아다닌다고 했다.

알량한 속임수일 뿐입니다. 네번째 사람의 낙타는 팔다리가 구겨진 채로 작은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매주 상자의 크기를 줄여나가는 중입니다. 훈련밖에는 답이 없습니다.

다섯번째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 흘렸다. 그의 낙타는 너무 많이 울어서 얼굴이 지워져 있었다.

바늘구멍 속 세계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음밖에는 길이 없어요. 여섯번째 사람이 일곱번째 사람에게 텅 빈 호주머니를 뒤집어 절망을 꺼내 보일 때.

일곱번째 사람은 다시 첫번째 사람이 된다. 낙타를 가져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p. 66~67
폭풍우 치는 밤에

나무가 부러졌다는 소실이 전해졌다
수호신처럼 마을 입구를 지키던 나무였다

사람들은 부러진 나무를 빙 둘러싸고 서서
각자의 시간을 떠올린다
소망과 악담, 비밀을 한데 모으면 한그루의 나무가 되었다

무엇이 나무를 부러뜨린 거지?
기껏해야 밤이었는데
우리가 미래나 보루 같은 말들을 믿지 않았던 게 아닌데

슬픔의 입장에서 보면 나무는 묶인 발이다
그네에 주먹을 꽉 쥐고 있던 나무가 보였다

바람이 나무를 흔들었다고 생각해?
나무는 매일같이 바람을 불러 자신을 지우고 있었어
발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마음이 매달려 있어서 

기억의 입장에서 보면 나무는 잠기거나 잘린 얼굴이다
간절히 씻고 싶었을 얼굴을 생각한다

 

 

p. 88~89
실감

우리의 여행은 달이 없다는 전제하에 시작되었다
달이 없다는 것 알면서도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걷는 동안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달은 다르면서도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을 찾으려면 밤의 한가운데로 가야 한다는 내게
너는 바다에서만 헤엄칠 수 있는 건 아니라 했고
모든 얼굴에서 성급히 악인을 보는 내게
사랑은 비 온 날 저녁의 풀 냄새 같은 거겠지 말했다

우리는 보폭을 맞추며 씩씩하게 나아갔다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온갖 종류의 그리움 같아 내가 말하면
구름이 아름다운 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겠지
핑퐁을 치듯

이따금 일렁이는 불에 젖은 마음을 말려보기도 했지만
언제나 시간은 거대한 장벽을 펼쳐 보일 뿐이었다

달 없는 밤을 견디기 힘들었다
고작 무릎까지밖에 안 오는 물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많았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우리는 신이 놓쳐버린 두개의 굴렁쇠처럼

하루하루를 굴려 잿빛 바다에 이르렀다

고작 이런 풍경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너는 헤엄치는 법을 알아야만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내일부턴 더 추워지겠네 쓸쓸히 웃었다
너무 어두워서 분명해지는 세계가 거기 있었다

 

 

p. 106~107
캐치볼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다
불타는 공이었다

되돌려 보내려면 마음의 출처를 알아야 하는데
어디에도 투수는 보이지 않고

언제부터 내 손엔 글러브가 끼워져 있었을까
벗을 수 없어 몸이 되어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알 수 없겠지 이 모든 순서와 이유들
망치를 들고 있으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이는 법이니까

나에게 다정해지려는 노력을 멈춘 적 없었음에도
언제나 폐허가 되어야만 거기 집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왔을 것이다
불행을 막기 위해 더 큰 불행을 불러내는 주술사처럼
뭐든 미리 불태우려고
미리 아프려고

내 마음이 던진 공을
내가 받으며 노는 시간

그래도 가끔은
지평선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다

불타는 공이 날아왔다는 것은
불에 탈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나는 글러브를 단단히 조인다

 

 

p. 110~111
측량

수신인을 알 수 없는 상자가 배달되었다

상자를 열어보려고 하자 그는 만류했다 열어본다는 것은 책임지겠다는 뜻이라고

우리는 상자를 앞에 두고 잠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때 상자가 움직였다 생명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했다 누군가에게 영원히 되돌아갈 집이 된다는 것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자라나는 이파리들을 날마다 햇빛 쪽으로 끌어다놓는 스스로를 상상했다 기대하고 실망하는 모든 일이 저 작은 상자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생각은 영혼을 갉아먹는 벌레 같았다 작고 하얀 벌레는 순식간에 불어나 온 마음을 점령했다 상자가 움직일 때마다 우리의 하루도 조금씩 휘청거렸고

고작 상자일 뿐이었다면 쉽게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잘못 배달되지 않은 사랑이 과연 있을까 더구나 생명이라면

너는 상자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물을 마시지만 물을 침범하지 않는 사랑을 알고 싶었다

 

 

p. 118~119
호두에게

부러웠어, 너의 껍질
깨뜨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심이 있다는 거

나는 너무 무른 사람이라서
툭하면 주저앉기부터 하는데

너는 언제나 단호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
한 손에 담길 만큼 작지만
우주를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너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흐르는 것일까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어떤 위로도 구하지 않고
하나의 자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가졌다는 것
너는 무수한 말들이 적힌 백지를 내게 건넨다

더는 분실물 센터 주변을 서성이지 않기
'밤이 밤이듯이' 같은 문장을 사랑하기

미래는 새하얀 강아지처럼 꼬리 치며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새는 비를 걱정하며 내다놓은 양동이 속에
설거지통에 산처럼 쌓인 그릇들 속에 있다는 걸

자꾸 잊어, 너도 누군가의 푸른 열매였다는 거
세상 그 어떤 눈도 그냥 캄캄해지는 법은 없다는 거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나날이 쪼그라드는 고독들을

 

 

p. 127~128
구르는 돌

나의 여정은
하나의 물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

사람들은 나를 돌이라고 부릅니다
어딘가에는 대하고 앉았노라면 얘기를 들려주는 돌도 있다지만
나는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돌에 가깝습니다
절벽의 언어와 폭포의 언어
들판의 언어와 심해의 언어
온몸으로 부딪쳐가며 얻은 이야기들로 나를 이루고 싶어요
그 끝이 거대한 침묵이라 해도

중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나무나 새를 부러워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은 견디기 위해 존재하는 것
우울을 떨치려 고개를 젓는 새와
그런 새를 떠나보낸 뒤 한참을 따라 흔드리는 나무를 보았습니다

서서 잠드는 것은 누구나 똑같더군요
모두가 제 몫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두렵습니다
혹시 나는 파괴를 위해 태어났을까요?
나의 전신이
한 생명을 무겁게 짓누르던 바위였다면

혹은 단단히 봉인해야 할 기억이어서
눈과 귀가 지워진 채 깊이깊이 잠겨야 했던 거라면

캄캄함은 나를 끝없이 돌려세우고
환한 시간을 향해 걷게 합니다

계속 가보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지만
언젠가는 대하고 앉았노라면 얘기를 들려주는 돌이 되고 싶어요
그게 무엇이든 무엇도 아니든

 

 

p. 134~135
열과(裂菓)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지만

지킬 것이 많은 자만이 문지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지기는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 다 훔쳐가도 좋아
문을 조금 열어두고 살피는 습관
왜 어떤 시간은 돌이 되어 가라앉고 어떤 시간은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치는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져야 했다
한쪽 주머니엔 작열하는 태양을, 한쪽 주머니엔 장마를 담고 걸었다

뜨거워서 머뭇거리는 걸음과
차가워서 멈춰 서는 걸음을 구분하는 일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열매들은 터지고 갈라져 있다
여름이 내 머리 위에 깨뜨린 계란 같았다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나의 과수원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 부르기로 한다
눈앞에 너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영원에 가까운 헤아림이 가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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