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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 2010
p. 13
세월의 학교에서
거리가 멀어지면 먼 바다여서
연락선 오고 가도
바다는 바다
섬은 섬
그 섬에서 문득 문득
하늘 보고 삽니다
세월의 학교에서
세월을 낚으며 삽니다
건너야 할 바다가
점점 커져 걱정입니다
p. 32~33
어떤 한 스님이
어떤 한 스님이
한 백 년 졸다 깨어 하는 말이
"心은 心이요 物은 物이로다"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잘 섞이면
心物이 만들어지고
物心이 만들어지고
사다리의 어느 위 계단으로 올라가면
초롱초롱 조롱박들이 한창 열려 있다
그리하여 心物이 物心이 되고
物心이 心物이 되고
(실인즉슨 心이 物이 되고
物이 心이 되고)
한번 해보자 하면
그 구별들은 한이 없고
그런 것이 아니오라 하면
순식간에 똑같은 세상이 된다
(아주 우울한 날에는
우윳빛 막걸리를 한두 잔 마셔라)
p. 45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없는 것은 아니다
나무들 사이에 풀이 있듯
숲 사이에 오솔길이 있듯
중요한 것은 삶이었다
죽음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거꾸로도 참이었다는 것이다
원론과 원론 사이에서
야구방망이질 핑퐁질을 해대면서
중요한 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삶 뒤에도 또 삶이 있다는 것이었다
죽음 뒤에 또 죽음이 있다는 것이었다
p. 50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그러나 이사 갈 집이
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
p. 54~55
時間입니다
과거를 현재로 살고 있는 사람들
파먹을 정신이 없어서
과거를 오늘의 뷔페식으로
섞어 먹는 사람들
언제쯤 그 정신이라도
끝날 날이 없을까
그 정신 뷔페식을
같이 먹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사람들
그냥 꿈결이었다고
건너 뛸 수는 없을까
해 지고 달 떠도
정신은 아귀아귀여서
과거의 바윗덩어리라도
삶아 뜯어 먹어야 한다는 사람들
과거 때문에 현재도 미래도
다 놓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찰칵찰칵 시간이 잘 지나갑니다
혹은 엘리엇的으로 時間입니다 時間입니다
p. 61
높푸른 하늘을
높푸른 하늘을 한번 걸어볼까
高空의 이슬 젖은 두 발은 가뿐하고
착륙도 하지 않은 채 오직 걷기만 하는······
높푸른 하늘을 한번 걸어볼까
수세기 너머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던 곳이 있을지도 몰라
푸른 모자 쓰고
높푸른 하늘을 한번 걸어볼까
p. 62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그 사막 한가운데서 나 혼자였었다
하늘 위로 바람이 불어가고
나는 배고팠고 슬펐다
어디선가 한 강물이 흘러갔고
(그러나 바다는 넘치지 않았고)
어디선가 한 하늘이 흘러갔고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한 세월이 있었다
한 사막이 있었다
※ 최승자 시인의 다른 작품
2021.12.27 - [북리뷰/문학반] -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 그만 쓰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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