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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2021
김용택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2021
p. 28
아름다운 산책
하늘이 깨끗하였다
바람이 깨끗하였다
소리가 깨끗하였다
달아나고 싶은
슬픈 이슬들이
내 몸에서 돋아났다
p. 29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올 수 없다
이슬 내린 풀밭을 걷다 뒤돌아보았다 이슬길이 나 있다
내 발등이 어제보다 무거워졌다
내가 디딘 발자국을 가만가만 되찾아 디뎌야 집에 닿을 수 있다
p. 32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잘 왔다
어제와 이어진
이 길 위에
검은 바위, 어린나무만이 나비를
숨겨준다
해야 바람아 흰 구름 떼야
내 자리를 찾아온 여러 날이 오늘이다
알 수는 없지만
어느, 고요에서 태어난 바람이 온다면
가벼이 날아오를 수 있다
기다려라 마음이 간 곳으로 손이 간다
검은 바위, 어린나무만이 이 나비를
숨겨둔다
p. 45
지금이 그때다
모든 것은
제때다
해가 그렇고, 달이 그렇고
방금 지나간 바람이,
지금 온 사랑이 그렇다
그럼으로 다 그렇게 되었다
생각해보라 살아오면서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있었던가
진리는 나중의 일이다
운명은 거기 서 있다
지금이다
p. 52~53
일어설 수 있는 길
오래된 길들은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지금 내가 꿈꾸는 모습
아버지와 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디뎠던 발자국이
햇살 속 바위에 벽화처럼 짐의 무게로 희게 남아 있다
돌들은 자국을 쉽게 지우지 않는다
아버지의 길은 나의 현실이 되어간다
홀로 걷는 산길, 아버지의 외로운 발걸음은 지금 보아도 외수가 없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다니는 족제비와 바위 굴 속 다람쥐
낙엽이 쌓여 썩은 바위틈이나 나무 밑동, 바람이 지나가고
햇살이 들었다가 금세 사라지고, 빗물이 고였다가 마르고,
눈이 쌓여 있다가 녹던 곳
마른 나뭇잎 뒤 축축한 곳이 발 많은 곤충들의 집이다
새들이 날아가는 나뭇가지 사이,
별들이 바스락거리며 지나다니는 그 곳
내가 꿈을 꾸는 곳, 보행자의 길
거센 바람에 휘어졌다가 일어서는
힘으로 이기고 선 눈 매운 나뭇가지들처럼
눈을 씻고 다음 발길을 옮긴다
잊은 다음을 잊어야 다음이다
토끼와 노루와 수꿩이 앞서 지나간 길
보폭이 보인다
쓰러진 풀잎을 뛰어넘고 어린나무를 비켜 돌아간 긍정의 길
나뭇가지에 얹혔다가 자유를 누리며 다시 떨어지는 수긍의 눈송이들, 그것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내가 꿈꾸는 모습
다람쥐가 바위를 딛고 다음 바위를 딛는 믿음
작은 벌레들이 마른 참나무 잎을 넘어가는 소리
돌들이 없다면 어둠은 어디서 오고
물고기들은 어디다가 정든 집을 지을까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간다
p. 54
침묵의 유리 벽
나비는 하루 종일 난다
비명도 절규도 삼켜버린 유리 벽 속 침묵의 거리
어쩌자고, 나비는 사람들이 버린 바람 속으로 날아왔을까
바람에 말려 접어놓은 흰 빨래 위에 앉고 싶다
고개 드는 마루 바람이 이는 집일 테니까
날개를 헐 수 없는 나비는 절대의 균형을 잃을까 두려워
오늘도 번쩍이는 거대한 유리 벽을 날아오른다
p. 55
아슬아슬 가을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따라가다가
길이 끊겨서 돌아왔습니다
가을 나비들이 한쪽 날개를 헐어 균형을 잡아갑니다
날개를 펼 때 바람을 이용하지 않은 나비들은
날개를 다 버릴 소실점이 어디인지 알고 있답니다
마른 풀들의 휘어진 고단한 등을 보고 서 있었습니다
내 손이 내 손을 더듬어 잡았습니다
구름들이 몸을 다 말린 후
산을 넘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대가 그만큼에 서 있거나 내게 오지 않아도
식지 않을 간격만큼 단풍 물을 옮아갑니다
나뭇잎을 주워 뒤집어보았습니다
가을에는 이별해도 소용없습니다
그쪽 강가에는 지금 혹시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나요
p. 59
내 눈에 보이는 것들
누구도 불행하게 하지 않을 마른 낙엽 같은 슬픔
누구를 미워한 적이 없었을 것 같은 새들의 얼굴에 고요
누구의 행복도 깔보지 않았을, 강물을 건너가는 한 줄기 바람
한 번쯤은 강물의 끝까지 따라가봤을 저 무료한 강가의 검은 바위들
모은 생각들을 내다 버리고 서쪽 산에 걸린 뜬구름
그것들이 오늘 내 눈에 보이던 날이었다
p. 64
기적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이 아무런 것이 될 때
그때 기쁘다 그리고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갈 때 편안하다 가까스로 산을 굴러 내려온 돌들이
강물에 몸을 담글 때 그것은 내 몸에서
물결이 시작되는 기적이었다
p. 76~77
신용목 시인의 발문 中
어떤 위안이 있어 희망을 말하기는 쉽다. 어떤 대결도 없이 절망에 가닿기는 쉽다. 그러나 알게 된다. 위안도 대결도 모두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희망과 절망의 자리 아래 말갛게 고이는 생활이라는 것.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눈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만 눈사람과 밥을 먹을 수 없고, 눈보라처럼 내달릴 수 있지만 눈보라를 껴안고 잠들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겨울 속에서, 겨울과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들.
※ 김용택 시인의 다른 책, 필사하는 시집
2021.12.20 - [북리뷰/문학반] - [책] 김용택 시인, 꼭 한번 필사하고 싶은 시, 드라마 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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