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김경후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김현문학패 수상 이후 첫작품

나에대한열정 2022. 1. 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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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후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2021

 

김경후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2021

 

김경후 시인 (출처: 연합뉴스 포토)

시인 김경후는 1998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열두겹의 자정>,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어느 새벽, 나는 리어왕이었지>가 있다. 2015년 현대문학상, 2019년 김현문학패를 수상했다.

 

 

p. 12
손 없는 날

귀신도 쉬는 날, 짐 부리는 사내, 빈 그릇 위에 빈 그릇, 의자 위에 의자, 쌓고 쌓는다, 귀신이 쉬는 날, 사내의 짐값은 높지만, 꼭대기 올라가는 사다리차만큼, 덜컹, 덜컹, 내려앉은 사내의 등, 사내는 손 없는 날의 손, 집을 옮기며 짐을 부린다, 동서남북을 옮긴다, 기억을 옮긴다, 귀신도 부리지 못할 짐,

벽 같은 짐들 앞, 짐의 주인이 말한다, 나뭇잎 그려진 상자 못 뵜어요? 기억 안 나요? 안 나요, 기억하는 자만 잃을 수 있다,

오늘 사내는 손이 없다, 힘이 없다, 불탄 낙엽 더미처럼, 빈방 그늘에 누웠다, 귀신은 뭐 하나, 나 같은 거 안 잡아가고, 손 없는 날, 귀신도 쉬는 날, 사내는 짐이 아닌 어리광을 부릴 힘도, 없다,

기억난다, 벽 같은 짐들, 그 집의 주인, 기억나지 않는다, 손 없는 날, 기억 난다, 기억하는 자만 잃을 수 있다,

 

 

p. 14~15
저만치 여기 있네

새해 첫날마다 지난해 토정비결이 맞았는지 맞춰본다
예언은 지연된다
잘못된 건 없어
시간은 멈추고 세월은 흐른다
일어나자마자 운 게 아니에요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사랑보다 빨리 쉬는 건 사람 그러나
난 쉬고 싶은 사람
울려면 일어나야 합니다
잘못된 건 없어
러시아혁명사 스터디 내내 새로 살 원피스만 떠오른다
혁명사를 읽을 때마다 봄꽃 무늬 피어오르는 난 혁명적인 사람
세월은 흐르고 시간은 멈췄다
그럼 자신을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자들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는 어찌해야 할까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다는군
변한 건 없지
고양이를 감시하는 카메라를 감시하는 고양이가
저만치 나를 보고 있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
시간은 멈추고 세월이 흐른다

 

 

p. 18
원룸 전사

밤마다 막차다. 아무도 없어도, 나는 몰고 돌아가는, 밤, 막차다, 배차 간격, 없음, 인센티브 없음, 유급휴가, 없음, 직업, 없음, 내가 탈 차, 없음, 기다릴 차. 없음, 막차에서 막차 사이는, 폐터널이지, 밤마다, 막차다, 출가하지 않아도, 밤새 흐르는 수도, 물방울 독경 소리, 면벽으로, 먼 산 먼 숲 조망 가능, 이러다 심안으로 동쪽에 창을 낼, 내가, 막차다, 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밤마다, 창 없이 창살 없이, 막차, 필요 없는 거, 없음, 둘 데 없음, 아무도, 올 수, 없는, 밤마다, 나는 막차다,

 

 

p. 24~25
사각지대

있습니까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랑합니다
없습니다

사랑이란 낱말이 씌어진 책은
읽지 않습니다
오늘은 구석구석
비질을 합니다
있었습니까
햇빛 멈추는 순간
빗자루 성운 별가루처럼 떠오르는 먼지들

창밖 자두나무
꽃 피기 전
우리는 몇 번 지나갔을까
없습니다
있었습니다

한밤 어둠 수고
끼이익
깊게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아무것도 보지 않습니다

 

 

p. 30~31


그건 젖은 나무 문이 주저 앉을 때
그건 가슴뼈를 움츠릴 때
그건 할 말이 없을 때
나는 소리

슬픔이 무릎을 건드릴 때
그래도 설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소리
마음의 고무줄 삭아 끊어질 때
나는 소리



밤의 송곳니가 부러지는 소리
그때 우리도 함께 부러지는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
서로 돌아서는 소리

홀로가 아니라 스스로 내가 되는 소리


내가 나를 뚫어지게 보라고
진흙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젖지 않은 나무 문은 내지 못할 소리

 

 

p. 38
항아리

옥상에 빨래를 넌다
빨래란 게 별건가 지나간 것들이지
지나간 여름 지나간 셔츠 얼룩진 이불
지나간 일들 지나간 사람 얼룩진 이름

빨랫줄에 걸린
거두지 못한 빨래들
늦가을 밤바람에 기우뚱

옥상 센서 등 켜진다
느닷없이 꺼졌다 켜진다
항아리치마 환하게 부풀어 오른다
그 속 빨간 금붕어 두 마리가 있나
바람 물결 일으키며 헤엄이라도 치려나

센서 등 켜졌다 꺼진다
별건가 다시 빨래를 넌다
옥상 한구석 빈 항아리

 

 

p. 52~53
수행 중입니다

꽉 찬 3호선 불광역
난 지하철에서도 수행 중입니다
앞에 앉은 노인들 시끌벅적,
그래도 난 수행 중입니다
야, 내려, 왜,
종로3가는 거꾸로 타야 해,
내려, 내려, 아, 정말,
그러나 종로3가는 이 방향이 맞습니다
그러나 소리 빛깔 냄새 그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언,
수행하려 합니다
노인들이 내리도록 가만있습니다,
빨리 문 닫히길, 그분들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설레며,
그들이 남긴 따스한 자리에 앉아
흔들리지 않고 화내지 않고 즐기지 않고
수행 중입니다
희열이 뱃속 가득 차오릅니다
흔들립니다, 수행 중입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수행 중입니다
다음 내리실 역은 종로3가입니다

 

 

p. 56
돈 신의 극장에서

그 팅 빈 올가미 차지하기 위해 쉬지 말 것
맨발로 뛸 것
까짓 영혼도 던질 것
동전 한 닢이라면 앞면이든 뒷면이든
일단 침 발라둘 것
죽음처럼 늙지 않는 신
혼돈보다 드넓은 신
그 그물에 걸려들기 위해
피 흘리는 투우처럼
목덜미 찢긴 투견처럼 날뛸 것
자. 이제 자네는 어떻게 걸려들 텐가

 

 

p. 79
헤어질 사람이 없는 사람

담장 넘어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9회말 파울볼

저물녘 담벼락

그림자만 그리는 밤

벚꽃들 모두 지면 벚나무 잎 짙푸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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