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김중식 [울지도 못했다]

나에대한열정 2022. 1. 8.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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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식 <울지도 못했다>2018

 

김중식 <울지도 못했다> 2018

 

김중식 시인 (사진 출처: 중앙포토)

 

김중식 시인은 1967년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1990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했다. 1993년 첫 시집 <황금빛 모서리>를 출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따뜻한 비관주의자"라고 강상희 문학평론가의 평을 들었다. 문단의 평도 좋았고, 나름 대중적인 지지도 받았지만, 그 이후로 오랜 시간 동안 김중식 시인은 시를 써내지 않았다.

 

1995년 일간지 기자로 취직해 일을 하면서, 잠시 짬을 내어 시를 쓰는 일은 시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생업이 있으면서 시를 쓰던 사람을 얕잡아 봤다는 고백과 함께 말이다. 이런 자신의 심정을 담아, 두 번째 시집인 <울지도 못했다>의 앞부분에 "나는 근본주의자였다/두 손으로 번갈아 따귀를 맞았다"라는 표현으로 그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김중식 시인은 경향신문 기자, 중앙선데이 객원기자, 국정홍보처, 문화체육관광부, 대통령비서실 근무를 거쳐, 2012년 주이란 한국대사관에 3년 반 동안 근무하게 되는데, 당시 이란에서 자행되는 독재에 답답함을 느껴 해소할 것이 필요했다고 한다. ("자유니 뭐니 거창하게 말할 수 있었지만, 시를 쓰지 않으면 도무지 살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시를 다시 쓴 것은 숨을 쉬고 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25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울지도 못했다>가 출간되었다.

 

 

시집의 뒤표지에는 '인공지능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나는 인간의 영역에 재도전하련다. 첫 시집이 고난 받는 삶의 형식이라면, 이번 시집은 인간의 위엄을 기록하는 영혼의 형식이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 

 

 

시집을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난리도 아닌 고요>에서는 눈시울마저 뜨거워졌다. 급기야 <늦은 귀가>에서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이제야 시집의 제목이 눈에 다시 들어왔다. 울지도 못했다... 라니... 난 이 시점에 제대로 눈물 콧물 범벅이 되는데 말이다. 시인 대신 내가 울듯이 꺼억꺼억 소리 내어 울고 싶어졌다. 시를 보면서 운다고 아이들이 당황해했다. 그래도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하겠다.

 

시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시인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고 감히 써본다. 

 

 

p. 13
스키드 마크

이번 삶은 늦었어.
급제동하는 순간
당신이 옳았다

당신은 늦었다
낮술에 취하든 졸았든 그이를 생각했든
뱃가죽으로
아스팔트를 움켜쥔 채
두 획
혈서를 쓴 거다
빗길에서도 한 호흡에 폐를 채우는 타이어 타는 냄새

외눈박이 가로등이 ㄱ자로 허리 굽혀
하직 인사를 하지
길이 아닌 것도 아닌데
앞만 보고 죽어라 달린 것도 아닌데
자꾸 미끄러지는 삶
이번 생은 늦었다
당신이 옳았다

 

 

p. 14~15
랜섬웨어 바이러스

잘못 건드린 모양이다
뭘 눌렀는지 모르겠는데

검은 비 내리고 긴 죄의 꼬리표가 붙으면서
내가 이룩한 도시가 대홍수에 쓸려 내려간 느낌
물이 빠져도 쓰레기만 해초처럼 코 박고 있으니

잘못 건드린 죄 하나로 벌받는 느낌
경經이 말씀대로 이룬 일은 지옥밖에 없음!
없음!

아무에게도 이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믿음을 쓸어버리기로 한다
천한 사람들은 없어도 천한 영혼은 있으며
개의 새끼가 될지언정 개만도 못한 인간이 있다는 것을

악인도 잠을 자는데
잠 속에서도 없는 죄의 용서를 빌어야 하는, 이것이 지옥이다

아기 난민은 문 닫힌 세계로 가다 해변에 코 박고
반지하 창문을 두드리던 청년은 굶어 죽으며
세월은 가라앉는다

뭘 잘못 건드린 것인지
어떤 버튼을 누른 것인지

 

경經: 지날 '경'

1. 직물의 날실: 경도, 경위

2. 지나가다: 경과, 경로 / 겪다, 겪는 것: 경험, 경력

3. 통로, 길: 신경, 경락

4. 글: 경전, 성경

5. 다스리다: 경영, 경제

 

 

p. 20~21
1394 is 주체

나, 하도 속물이어서
절밥은커녕 젯밥만 봐도 헛구역질하는데
어쩌다 경經을 파먹으며
중세 수도원을 찾아다녔나 몰라

천국을 맛본 지, 맨정신이 싱겁겠으나
꿈결에 지은 집은 꿈 깰 때 접어야 하는데
이마에 찍은 화인火印으로 
먼 곳을 비추는 서치라이트

지상에 세운 천국은
팝업 그림책으로 벌떡 일어서는 병풍 지옥도

(남 예기가 아니지,
혀 깨문 독사처럼 귀 막은 채
제 입으로 주체에 키스한 IS교
사랑 없이 혁명을 하던 이념의 인공지능들이었지)

나는 돌아다니며 여러 신에게 기도했지
울면서, 술기운으로
주여, 천국을 제자리에 두소서
아무것도 하지 마소서
(신이여 썩 물러가라!)

술김에 한 말은 술 깰 때 접어야 하는데
아직 흘릴 피가 남아 있다면
나는 죽어 지옥 갈테니
너흰 천국에서 살아라
아무것도 안 한 사람들끼리 C U in Hell.

 

경經: 위의 설명 참조

화인 火印: 1. 쇠붙이로 만들어 불에 달구어 찍는 도장, 목재나 가구, 가축 따위에 주고 찍고 예전에는 형벌로 죄인의 몸에 찍는 일도 있었다. 2. (역사) '장되'를 달리 이르는 말. 관부에서 만들어 낙인을 찍어서 시장에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른다. '장되'는 장에서 곡식을 되는 데 쓰도록 관아에서 낙인을 찍어 공인하여 만든 되.

 

 

p. 24~25
난리도 아닌 고요

아무리 둘러보아도
새는 새고, 산은 산이다
새소리도 산의 고요에 한몫하는
평일 저물녘 하산下山길

피할 수 없으면 조용히 살자.
나를 분리수거해서 세상 더럽히지 말자.
다짐하면서 내려오는데

산 전체가 비명悲鳴으로 연대連帶한다
난리 때 봉화가 그랬을까
매 한 마리 떴을 때
무인도 갈매기가 통째로 이륙하듯
난리다

어미 새들은 헬기 자세로 솟구치다
뒷덜미를 낚아채인 고양이처럼
강품에 뒤집히는 순간의 우산 모양이다

새들은 무엇을 보고 뒤집어졌을까
새는 새가 아니고
산은 산이 아닌가

나만 다스리면 될 것 같은데.
나는 난리도 아니다

 

비명悲鳴: 슬플 '비', 울 '명'

1. 슬피 욺, 또는 그런 울음소리

2. 일이 매우 위급하거나 몹시 두려움을 느낄 때 지르는 외마디 소리

 

연대連帶: 연결할 '연', 띠 '대'

1.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짐

2.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

 

 

p. 33
늦은 귀가

돌아보지 않으면 길이 아니다 지구 반 바퀴를 뜬눈으로 날아야 하는 철새는 긴 목을 가슴에 비빈다. 얼마나 가야 할지를 따지는 것은 몸 밖으로 나간 정신처럼 얼마나 되돌아올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산. 올라갈 땐 괜찮았는데 왼쪽 무릎뼈가 쑤셔 주저앉았다가 한쪽 발로 하산할 때, 나는 내가 지난 세월에 얼마나 날뛰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울지도 못했다

 

 

p. 40~41
그대는 오지 않고

졸아붙어 바닥을 태우는 냄비처럼
살 수는 없는 일.
먼 길이 두려운 게 아니다
잃어버릴 게 많아서다

체질까지 바뀌어
더운 날엔 땀 나고
올챙이배가 무덤 같아서
팔짱을 올려놓는 나른한 오후

2단 로켓이 점화되기 직전
허공에 부동자세로 떠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처럼
가면 가겠지만
대기권에 재진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혁명이 아니면 사치였던 청춘
뱃가죽에 불붙도록 식솔과 기어온 생
돌아갈 곳 없어도 가고 싶은 데가 많아서
안 가본 데는 있어도 못 가본 덴 없었으나

독가 대가리 세워서 밀려오는 모래 쓰나미여.
바다는 또 어느 물 위에 떠 있는 것인가
듣도 보도 못 한 물결이 옛 기슭을 기어오르고
두 눈은 침침해지고 뵈는 건 없는데

온다는 보장 없이 떠나는 건 나의 몫
신마저 버린 땅은 없으므로 풀잎은 노래한다
온몸을 떨었어도 그대 오지 않았듯이
더듬어 돌아올 길이 멀어지는 게 두려울 뿐.

 

 

p. 42
어쩌다 종점

가보지 않은 길이 새로운 길은 아니었다
'살다'를 길게 발음하면 '떠난다'는 뜻이 되고
헤매다 보면 종점이었다

암전 후 조명 들어왔을 때
어쩌다 여기지?
잘못 표시한 동선인가?

눈 둘 곳 없는 눈길로 세상 아닌 곳에서 거처를 찾았다
미끄러질 때만 무게를 놓는 삶
영원과 같은 찰나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살다'를 길게 발음하면 '떠난다'는 뜻이므로
초단위를 아껴 떠나시기를
'시인'도 빨리 발음하면 '신'이 되므로.

 

live [liv] --------> leave [li:v]

 

 

p. 45
이 더러운 세상

세상일이 헛돌아
한 번쯤 등질 수는 있겠으나
가서, 왜 안 나오는 걸까
나는 사막보다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 혹했다

살 곳이 아닌 데서 사는 것은
가까이 오지 마!
건드리지 말라는 뜻 같아서
멀리서 지켜본 공작새 일가

가시덤불에서 찾아낸,
공복을 채울 수 없는 벌레 한 마리를
새끼 입에 넣어주는데
먹고산다는 건 한 끼 한 끼가 빅뱅이다

못 볼 꼴을 봐도 백 번을 목격하는 공작새
하나가 아프면 백 개의 눈깔이 다 아프다
더러운 세상을 피해 다녔으나
더러운 세상을 버릴 수 없는

 

 

p. 48~49
바람의 묘비명

<낙타 여인숙> 주인장은 코웃음 쳤다
여기서 태어났으니 사는 거지
딴 데 살다가 못 들어온다고.
사파리하면서 낙타 고기나 먹으라고.

사람 살 곳 아닌 데 사는 사람의 시조는
금지된 사랑의 투석형이나
부족 청소의 학살을 피해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살아도 산 게 아닌 곳으로
도망친 사람일 듯

구름과 바람도 없이
그리하여 비도 없이
풀포기와 개미도 없이
머물 곳이 아닌 데서
또 다른 구약의 족보를 썼을 듯

사는 게 별거더냐
다 똑같으므로 그냥 내버려두면 되는데
똑같지 않다면서 내버려두지 않을 뿐

지진 같은 치통과
이마에는 빗살 무늬,
살을 째는 각질을 달고 여기까지 왔는데

사막에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람 없는 곳이 사막인 거라서

 

 

p. 66
기차

너무 많은 사랑이 단풍잎 같은 차창처럼 달려가네. 보내고 싶지 않아서 길어진 기차, 뒷걸음치면서 붉그락노르락 손 떠는 나의 사랑아, 불타오르던 사랑이 당신속을 태웠으니, 나는 피할 수 없는 세상 속으로 떠나고 그대는 길을 잃었네. 당신은 내가 사막을 건널 때 끝까지 간직한 한 줌 소금. 깨물어 오래오래 머금을수록 다디단 사랑. 후회 없는 삶은 없고 덜 후회스런 삶이 있을 뿐. 아무 말 하지 말라고 말하는 당신, 안녕

 

 

p. 76~77
미래 비전

늙어갈 뿐 죽지 않으므로
노인은 많은데 어른이 없다.
세월을 이길 수 없으므로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는 일은 괴롭다.

아들딸아, 아빠가 요기까지밖에 못 왔다.
재수 없으면 백 살까지 살 텐데
변기에 붙어 소변을 버티는 파리처럼
쓸데없는 곳에 생 바치지 않으련다.

잘할 것 없으니
못난 걸 남기지 않으마.
물려줄 게 없다면 그림자도 남기지 않으려 한다.
수목장이면 나무에게 미안하다만 거기까지는 모르겠고.

국가는 빚내지 마라.
내 아들딸이 갚을 돈이다.
내 아들딸이 살아갈 세상은 싸우지 좀 말고
아들딸, 너희가 천둥 번개처럼 살아라.
유리 스크린 깨고 뛰어나오는
호랑이처럼.

 

 

p. 88
다시 해바라기

이 세상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가자.
해서 오아시스에서 만난 해바라기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겠으나
딱 한 송이로
백만 송이의 정원에 맞서는 존재감
사막 전체를 후광으로 지닌 꽃

앞발로 수맥을 짚어가는 낙타처럼
죄 없이 태어난 생명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성모같다
검은 망사 쓴 얼굴 속에 속울음이 있다
너는 살아 있으시라
살아 있기 힘들면 다시 태어나시라

약속하기 어려우나
삶이 다 기적이므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사막 끝까지 배웅하는 해바라기

 

 

p. 94~95
신재생 알코올 에너지

되는 일도 없지만
딱히 할 일도 없을 때
다른 세상으로 보내주는 마약

잠시 먼 곳으로 소풍 가서
시인은 방언을 하고
여인은 사슴 눈을 달고 나온다우

뼈와 뇌의 고단함을 달래는
실신失神의 물방울.
단군 이래 증가하는 재생 에너지에 한 표!

한 글자까지가 신의 선물.
사랑조차 두 글자.
사랑조차 사람이 하기 나름

일 끝나면
새도 아닌데 날아다닐 시간
취해서 읽은 시가 아름다우므로 또 마신다우

사랑은 살아 있다는 것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지만,
술은 살고 있다는 것을 잊게 해준다우.

 

 

p. 96~97
태양 에너지

뒤뜰에 가꾼 상추밭
큰 잎에 가린 가녀린 것이
몸을 비틀고 손을 내밀어
직사광선 한 점 쬐고 있다
연둣빛 한 잎이 망명선 같다.

생각하는 사람처럼 45도 각도로 삐딱한 소나무
질풍노도 시절에 뿌리가 흔들렸던 듯
버팀목 피고 있는데
배밀이 아기가 상체를 들어 올리듯
허리 꺾은 가지들이 수직 방향으로 손 내밀고 있다

여기에? 싶은 곳에 순한 사람들이 산다
슬로비디오로 총알을 피하는 영화 장면처럼
살기 위해
온몸을 비틀어
평화를 구하고자 손 내민 피난민들이다

풀잎도 뿌리 내리기 힘든 사막.
숨 쉬기 어려운 고산.
독사가 독충을 먹는 밀림.
설원이나 습지 그 어디든

상처가 아문다면
거기가 태양 아래 1번지
손 뻗으면 손잡아주는 애인처럼

 

 

p. 103
참 시끄럽다

개나리 피었는데 또 폭설!
한 계절이 그냥 가지 않는다
뒤끝이 좀 있어

숲을 걸으면 풀벌레 소리 잦아들다
언제 그랬냐는 듯 북새판 된다
말 한 마디로 조용해질 세상이 아니다

그래, 아무리 살아봐야 가을은 익숙해지지 않지
안개 속으로 내려온 양떼구름
세상과 어긋나 자꾸 헛디디게 되지

이 산 저 산 적막강산
다들 잠든 척하지만 속으로는 바쁜 거야
좀 지나봐, 우글우글할 테니

 

 

p. 105~106
물결무늬 사막

이 땅에 언제 파도가 왔다 갔는지
사막 전체가 물결이다
멀리서 바다였는데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신기루
소금 사막에 묻힌 미라는
만 년간 잘 잤네

이루지 못할 약속을 할 때
우리는 다가가면서 멀어진다
우는 이유를 잊을 때까지 우는 여자여
우리는 가끔씩 울어야 한다
우주가 좁도록 세포분열하는 아메바처럼
우리는 만난 적도 없는데 한가득 헤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건
가을 숲 불꽃놀이가 끝나더라도
우리가 할 일은 봄에 꽃을 피우는 것
가장 깊은 상처의 도약
가장 뜨거웠던 입의 맞춤
할례당한 사막 고원에 핀 양귀비처럼

언제 파도가 왔다 갔는지
사막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
이루지 못할 약속을 할 때
우리는 다가가면서 멀어질지라도
봄에 할 일은
꽃을 피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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