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황동규 [오늘 하루만이라도]

나에대한열정 2022. 1. 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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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오늘 하루만이라도> 2020

 

 

황동규 <오늘 하루만이라도> 2020

 

 

 

황동규 시인 (사진출처: 네이버 포토뉴스)

 

황동규 시인의 열일곱 번째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1938년생,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소나기>의 황순원 작가의 아들이다. 1958년, 19세에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시월, 즐거운 편지>로 등단했다. 60여 년 동안 시를 쓰고 있는 황동규 시인은 이번 시집이 마지막 시집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계속 시는 쓰겠지만, 그 시들은 유고시집에나 실리지 않겠냐며. 

 

열렬한 팬으로... 앞으로도 많은 새로운 시집이 계속되기를...

 

 

p. 16~17 
오늘 하루만이라도

은행잎들이 날고 있다.
현관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또 하나의 가을이 가고 있군.

수리 중인 엘리베이터 옆 층계에 발 올려놓기 전
미리 진해지려는 호흡을 진정시킨다.
해 거르지 않고 한 번쯤 엘리베이터 수리하는 곳.
몇 번 세고도 또 잊어버리는
한 층 계단 수보다 두 배쯤 되는 수의 가을을
이 건물에서 보냈다.
그 가을 수의 세 배쯤 되는 가을을
매해 조금씩 더 무거운 중력 추 달며 살고 있구나.

2층으로 오르는 층계참 창으로
샛노란 은행잎 하나 남아 들어온다.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은행잎! 할 때 누가 검푸른 잎을 떠올리겠는가?
내가 아는 나무들 가운데 떡갈나무 빼고
나뭇잎은 대개 떨어지기 직전 결사적으로 아름답다.

내 위층에 사는 남자가 인사를 하며 층계를 오른다.
나보다 발 더 무겁게 끌면서도
만날 때마다 얼굴에 미소 잃지 않는 그,
한 발짝 한 발짝씩 층계를 오른다.
그래, 그나 나나 다 떨어지기 직전의 나뭇잎들!

그의 발걸음이 몇 층 위로 오르길 기다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집 8층까지 오르는 층계 일곱을
라벨의 「볼레로」가 악기 바꿔가며 반복을 춤추게 하듯
한 층은 활기차게 한 층은 살금살금, 한 층은 숨죽이고
한 층은 흥얼흥얼
발걸음 바꿔가며 올라가보자.

 

 

p. 19
초겨울 밤에

창밖엔 소리 없이 된서리 내리고 있었겠지.
밤 11시 반,
텔레비에서 말들이 날아오다 방바닥에 떨어진다.

깜빡 졸았나?
애써 잡은 영양 하이에나들에게 빼앗긴
치타 어디 갔지?
대답 대신 느낌들이 날아와 귓바퀴에 박히며
꼬리들을 떤다.
그래 알겠다. 안 들어도 알겠다.
뭘 이뤘다고 다 제 게 되는 게 아니다.
남기면 남의 것 되고 모자라면 내 것 된다.
그래도 남겨라, 이거지.
하이에나들이 인간처럼 웃었거든.
가만, 이런 생각들도
창밖의 된서리를 피할 수는 없을 거다.
길 잃지 말자고 갈림길 나뭇가지에 매어논
색 바랜 리본들로나 남을까.
젖은 눈 내리면 영락없이 상처로 보일 거다.

 

 

p. 24~25
죽음의 자리와 삶의 자리

집을 나서자마자 방금 나온 방이 생각나는
2018년 12월 28일 아침, 바람도 불어 체감온도 영하 18도
두툼한 모직 라이닝 댄 코트 입고 나섰어도
곧장 몸에 달라붙는 추위.
마을버스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리 후들후들 떨기 시작하다 버스에 오른다.
안경이 흐렸다가 갠다.
그래, 다른 감각들도 눈 감았다 뜨고 감았다 뜨곤 했으면!

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예기치 않던 향내 방 안에 은은하다.
살펴본다.
아 한란!
그동안 물 잘못 주어 여러 난 죽인 텔레비 옆자리에 앉아
며칠 정 선물로 들어온 난이 막 향내 풍기고 있다.
나는 한란 자주 죽이는 사람.
지금 꽃 피운 곳이 죽음의 자리인 걸 모르고.

깊은 숨 몇 번 들이쉬니
창밖 저 아래 밀어논 눈 더미가 내려다보인다.
참샌가, 조그만 다갈색 새 하나
그 앞에서 땅을 쪼고 있다.
그 뒤에 한 마리, 그 뒤에 또 한 마리
저녁 햇빛 속에 앙증스레 땅을 쪼고 있다.
눈 돌렸다 다시 보니 셋이 머리 서로 맞대고
고개 까딱까딱 힘께 땅을 쪼고 있다.
간질간질 정답다.
그렇지, 한란.
그 어디서고 삶의 감각 일깨워주는 자에게
죽음의 자리 삶의 자리가 따로 있겠는가?

 

 

p. 53
또다시 겨울 문턱에서

대놓고 색기 부리던 단풍
땅에 내려 흙빛 되었다.
개울에 들어간 녀석들은
찬 물빛 되었다.
더 이상 뜨거운 눈물이 없어도 될 것 같다.

눈 내리기 직전 단색의 하늘,
잎을 벗어버린 나무들,
곡식 거둬들인 빈 들판,
마음보다 몸 쪽이 먼저 속을 비우는구나.
산책길에서는 서리꽃 정교한 수정 조각들이
저녁 잡목 숲을 훤하게 만드고 있겠지.
이제 곧 이름 아는 새들이
눈의 흰 살결 속을 날 것이다.
이 세상에 눈물보다 밝은 것이 더러 남아 있어야
마감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견딜 만한 한 생애가 그려지지 않겠는가?

 

 

p. 62
맨땅

꽃잎 괜히 건드릴까 조심하는 바람처럼
가파른 언덕을 촛불 안 꺼뜨리듯 조심조심 내려와
맨땅에서 넘어졌다.
어이없지 않다.
해가 뜨거나 비가 오거나
아닌 밤중에 싸락눈 사락사락 내리거나
내 삶의 마지막 토막은 결국
맨땅이 되지 않겠나.
눈비 번갈아 맞고 땡볕 따갑게 쪼여대
기쁨 성냄 미움 아픔 같은 거 다 증발하고
채 비우지 못한 마음마저 증발하고
목에 걸려 남아 있던 말들도 먼지 되어 날리는
금 쩍쩍 갈라지는 맨땅,

태어날 때 거꾸로 매달려
엉덩이 맞고 시작한 눈물은
대충 말려 갖고 가겠네.
눈물 자국은, 글쎄
제풀에 희미해지도록 놔두시게.

 

 

p. 70~71
눈이 내린다

잡동사니 상자에서 오래된 출판계약서 찾다가
대신 건진 옛 공책,
뒤적여보니
후회하는 버릇은 그때도 그대로,
지난날에도 생각보다 신나게 살진 못했군.

마음 가다듬고 빈칸에다 계절에 어울리게
'눈이 내린다'라고 쓴다.
눈 돌려 창을 보니 거짓말처럼
어른어른 눈발이 비친다.
예감이 즉석으로 이뤄지는 때가 왔나 보다.
'새들아 춥지?'라고 쓴다.
조그만 새 하나 조심히
눈 속을 날아 창을 건넌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며
하늘 땅 구별 없이 한 색으로 칠한다.
지금쯤 마을버스들도 엉금엉금 기겠지.
서달산 산책하다
다가가는 나를 놔두고 눈 속을 쪼아대기 바쁘던
'서달산 새들아, 배고프지?'라고 쓰다가
'서달산 새들아, '까지만 쓰고 만다.

 

 

p. 72
침묵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아무리 곱게 봐주려 해도 식상한 말을 계속 내뱉는
내가 싫어지면 언덕에 올라간다.
현충원 담장 밖 봄 한창.
나는 모르는 새 꺾인 꽃이다.

나무와 꽃들은 말이 없어도 심심치 않다.
그들의 말 없음 속을 걷다 보면
생각을 말로 그럴듯하게 꾸미는 일이 싱거워진다.
착각인가, 아는 꽃나무 하나가 모처럼 말문을 연다.
'꽃 하나 뜯길 땐 욕은 내뱉었어요.
가지째 꺾일 땐 침묵을 배웠지요.'
그때 몸 덜덜 떨지는 않았니? 눈으로 묻자
대답 대신 웃는다.
말 아껴 사는 일엔 그가 한 수 위!
그의 침묵 앞을 천천히 지나가기만 해도
안 보이던 삶의 자리 하나가
저녁 전철의 좌석처럼 슬며시 챙겨지지 않는가.
대답 대신 웃자.

 

 

p. 73
솔방울은 기억할까?

오랜만에 산책길 바꿔 새 언덕에 오르다 만난
도끼질에 밑동만 남은 어린 소나무.
주위에 아직 덜 마른 솔방울들이 널려 있다.
생전에 솔방울을 몇 번 떨궈봤니?
허전한 곳 슬쩍 지나치듯 눈 돌쳐 가려는데
눈이 말을 듣질 않는다.
도끼 맞고 송진 내뿜으며 험하게 세상 뜬 나무의 아픔
솔방울들은 기억할까?
넘어지는 나무에서 떨어져 굴러 풀 속에 누우면서
이제 아픔과의 연줄 끊었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오늘 같은 날 혼자 우두커니 딴생각에 잠겨 있을 때
도끼질 소리 문득 되살아나
아픔보다 더 격한 감정에 휩싸인 적은 없니?
솔방울 하나 집어 들고
냅다 던질 곳을 찾다 만다.

 

 

p. 111
나의 마지막 가을

이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조그만 산골 절터,
내가 마지막 가을을 보낼 곳은 여기다.

성긴 풀밭에 검은 주춧돌들 아무렇지 않게 뒹굴고
작자 자기 곡선 그리며 내린 낙엽들이
찬바람에 이 구석에 몰렸다
저 구석에 몰렸다 하는 빈터.
산새 하나 부리가 시린 듯
짧게 짧게 울다 말다 한다.
적막 같은 건 없다.
늦가을 저녁, 남은 햇빛 속에
우박이 와르르 풀밭에 튕기며 환하게 내리고
이 빠진 가사로 옛 노래 흥얼대다 우박 맞고 얼얼해져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르게 되는 곳,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이제 어디로 가는지,
굳이 물으시겠는가?

 

 

p. 118
선운사 동백

벼르고 별러
이번이 마지막, 하며 찾아왔다.
전보다 개화 이르리라는 말을 듣고 달려왔다.
허나 선운사 동백은
이번에도 만개하지 않았다.
여기 한 송이 저기 또 한 송이
쑥스러운 듯 입술 열락 말락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허탕,
정말 연이 없군! 돌아서는데
누군가 자신을 타이르듯 속삭였다.
'봄물 막 오르는 산과 들을 질러 오는 차창에
봄 그림에 자주 오르는 뭉게구름 내내 피어 있었지.
그것만으로도 제값 한 걸음이네.'
속삭임이 이어졌다.
'몇 번 찾아와 못 보고 가는 것도 좀 있어야
마지막 가는 길 그만큼 가벼워지지 않겠나?'
하긴 그렇기도.
언젠가 이 세상 두고 나갈 때
최근에 불새가 불 속에서 불씨를 쪼듯
잊지 못할 민어회 맛 한번 진하게 쪼은 신안군 임자도를
모르는 척 놔두고 갈 순 없겠지.

 

 

p. 122~123
사람에게서 사람을 지우면

오래 정성 쏟아붓던 텃밭 지우듯
지우고 싶은 사람을 지우면 무엇이 남을까?
잡풀 웃자란 남새밭?
낙엽을 쓸다 바람 가버린 가로수 길?
새벽에 예고 없이 동파된 수도?

힘든 추억 하나 눅이려고 빌린 외딴집
새벽에 눈 그치고 물이 그친다.
물 데우는 일 거르고 눈 가득 담긴 마당으로 나간다.
흐린 하늘 아래 눈 쌓인 언덕배기 하나
가까운 신기루처럼 떠 있다.

문득 탁탁탁 소리, 눈가루가 뿌려 올려다보니,
붉은색 검은색 흰색 회색 그리고 갈색 조금.
색색으로 그러나 튀지 않게 옷 입는 새 하나가
나무 위 단색 공간에서 눈을 털고 있다.
'아 오색 딱따구리!'
누군가 함께 감탄하는 기척 있어 주위를 둘러본다.
뵈진 않지만 그 누군가도 나처럼 손 내밀어 눈가루 받으며
나무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다시 뿌려지는 눈가루, 딱따구리 탁탁탁.
'탁탁, 오래 같이 떠돈 사람 마음에서 지우면
지워진 사람 어디 가 떠돌겠나?
눈으로 눈이 지워지겠나? 탁탁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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