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기억의 집]

최승자 <기억의 집> 1989

 

 

최승자 <기억의 집> 1989

 

 

 

 

p. 14
이제 전수할

이제 전수할 슬픔도 없습니다.
이제 전수할 기쁨도 없습니다.

떠납니다.
막막 하늘입니다.

떠나지 못합니다.

배고픔뿐인 그대와
배고픔조차 없는 내가 
피하듯 서로 만나
배고픈 또 한세상을 이룩하는 것을
고장난 신호등처럼
바라봅니다.

(꿈이여 꿈이여
늙으신 아버님의 밑씻개여)

 

 

p. 15
길이 없어

길이 없어 그냥
박꽃처럼 웃고 있을 뿐.

답신을 기다리지는 않아요.
오지 않을 답신 위에
흰 눈이 내려 덮이는 것을
응시하고 있는 나를 응시할 뿐.

모든 일이 참을 만해요.
세포가 늙어 가나봐요.
가난하지만
이 房은 다정하군요.
흐르는 이 물길의 정다움.
물의 장례식이 떠나가고 있어요.

잊으시지요.
꿈꾸기 가장 편리한 나는
무덤 속의 나니까요. 

 

방(房): 방 '방'

 

 

p. 18
어떤 아침에는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내가 나를 버리고
손 발, 다리 팔, 모두 버리고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숨죽일 때
속절없이 다가오는 한 풍경.

속절없이 한 여자가 보리를 찧고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보리를 찧고, 그 힘으로 지구가 돌고······

시간의 사막 한가운데서
죽음이 홀로 나를 꿈꾸고 있다.
(내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이십 세기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p. 24~26
기억의 집

그 많은 좌측과 우측을 돌아
나는 약속의 땅에
다다르지 못했다.

도처에서 물과 바람이 새는
허공의 방에 누워, "내게 다오,
그 증오의 손길을, 복수의 꽃잎을
노래하던 그 여자도 오래 전에
재가 되어 부스러져내렸다.

그리하여, 이것은 무엇인가.
내 운명인가. 나의 꿈인가.
운명이란 스스로 꾸는 꿈의 다른 이름인가.

기억의 집에는 늘 불안한 바람이 삐걱이고
기억의 집에는 늘 불요불급한
슬픔의 세간살이들이 넘치고,

살아 있음의 내 나날 윙에 무엇을 쓸 것인가.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자세히 보면 고요히 흔들리는 배.
더 자세히 보면 고요히 갈라지는 배.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살고 있는 이들의 그림자.
혹은 긴 한숨 소리.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일찍이 나 그들 중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하나이지만,
잠시 눈 감으면 다시 닫히는 벽.
다시 갇히는 사람들.
갇히는 것은 나이지만,
벽의 안쪽도 벽, 벽의 바깥도 벽이지만.

내가 바라보는 이 세계.
벽이 꾸는 꿈.

저무는 어디선가
굶주린 그리운 눈동자들이 피어나고
한평생의 꿈이 먼 별처럼
결빙해가는 창가에서
나는 다시 한번

아버지의 나라
그 불빛 흔들리는 강가에 다다르고 싶다.

 

 

p. 34
외로운 여자들은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는 전화통이 울리길 기다린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 때 자지러질 듯 놀란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결코 울리지 않던 전화통이 갑자기 울릴까봐,
그리고 그 순간에 자기 심장이 멈출까봐 두려워한다.
그보다 더 외로운 여자들은
지상의 모든 애인들이
한꺼번에 전화할 때
잠든 체하고 있거나 잠들어 있다.

 

 

p. 40
토악질

그대의, 그대들의 즐거움.
아무리 용수철처럼 튀어올라도
난 속지 않아, 속지 못해.
(행복하게 속고 싶어)

아직도 곧잘
희망에 푸릇푸릇 데쳐지고
절망에 달달 볶여지고
자포자기에 푹푹 고아지는
나는 수억 년 전부터의 원시적 아메바.

나는 슬픔의 소화기관을
갖고 있지 못하지.
그래서 슬픔을 먹는 대로
곧바로 토해버린다.
무의미한 끝없는 자동반복적 토악질.

 

토악질:

1. 먹은 것을 게워 냄, 또는 그런 일.

2. 남의 재물을 부당하게 빼앗거나 받았다가 도로 내어놓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p. 41
자, 준비가 되었다면

자, 준비가 되었다면 그대여,
이제 내가 그대의 마음 위에
정성들여 수를 놓아도 되겠는지.
이제 내가 그대의 마음 밭에
마음껏 사과탄을 퍼부어도 되겠는지.
그대여 그대여
준비가 되었는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널 가둬버릴 거야
- 시멘트로 꽁꽁 바른 듯이
내가 널 확 풀어놓을 거야
- 큰바다에 홀로 동동 뜬 듯이)

 

사과탄: 손으로 던질 수 있도록 만든, 사과 모양의 최루탄. 발사 장비가 따로 없고 작기 때문에 휴대하고 다닐 수 있다.

 

 

p. 45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p. 46
날이 흐리고

날이 흐리고 곧 비가 온다.
굴러가던 돌 몇 개가 멈춰 서고
지렁이들의 골방에선
지렁이들의 울음 소리
더욱 그윽하게 들린다.

비가 오는데, 내가 우냐고?
서정 시대는 끝났어.
서정 연습 시대가 있을 뿐이야.

 

 

p. 53
얼굴 뒤에

얼굴 뒤에
나는 감춘다.
너의 고통과 
너의 고통의 피맺힘에 관한
나의 지식을.

얼굴 뒤에
나는 감춘다.
내 자포자기의
내 패배주의의
그러나 무모한 힘을
그러나 무한한 근원을

 

 

p. 65
그거

술은 끊어도 담배는 못 끊겠는 거, 그거.
담배는 끊어도 커피는 못 끊겠는 거, 그거.
커피는 끊어도 목숨은 못 끊겠는 거, 그거.

믿지 못하는 사이
두 발이 푹푹 빠져들어간다.
빠져들어간다는 것까지도
믿지 못하는 사이로
두 발은 더욱 습한 곳으로
푹푹 빠져들어간다.

(나의 이성과 감정은 언제나
나의 현실보다 뒤지는 거, 그거.)

 

 

p. 71~72
노을을 보며

살아 있는 나날의, 소금에
절여지는 취기 같은 저 갈증.
누군가의 망막에 증기처럼 번져오르는 통증.
하지만 그래도 난 아냐, 난 못해.

전라도인지 조지아인지
어디서 또 아픈 일몰이 시작되고

봐, 봐, 저 붉은 노을 좀 봐.
죽을동 살동 온 유리창에 피칠을 하며
누군가 나 대신 죽어가고 있잖아.

심혈을 기울여 해가 지고
심혈을 기울여 한 사람이 죽고
심혈을 기울여 지구가 돈다, 돌 때.
나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세계를 내다보고

내 할 일은 그대 마저 다 죽고 난 뒤
흰 장갑 끼고
싸늘하게 빛나며
그대의 죽음에 비로소 입장하는 것뿐.

 

 

p. 81~82
겨울 들판에서

굴복할 때 사랑은 가장 아름다워······
가장 강한 강함이든
가장 약한 약함이든
그것에 굴복할 때
사랑은 가장 아름다워······

슬픔이여 이 논과 숲
이 낮은 산하에
내가 낮게 더 낮게 가라앉느니.

거두어다오
한평생의 열에 들떴던 이마를.

감기워다오
보지 말았어야 했을
모든 것을 보아온 이 사악한 두 눈을.

(이제 누가 새로이 건너기 시작하리라.
저 들판, 오래도록, 사람아
가로지르지 못했던 저 들판을.
그리고 너는 아직 햇빛이 허락되는 동안
너의 젖은 이승의 그림자를 말려야만 한다.)

 

 

p. 83
다스려야 할 상처가

다스려야 할 상처가 딱히 또 있어서
내가 이 곳에 온 것은 아니다.
세계가 일평생이 상처였고
그 상처 안에 둥우리를 튼
나의 현재 또한 늘 상처였다.

가장 깨끗한 욕망 혹은
가장 더러운 절망을 짊어지고
나는 이 산으로 올라왔다.

모든 물질적 정신적 소비가
지겨워 나는 떠났다.
나는 소비를 위한 생산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므로.

 

 

p. 89
기도하지 않으리라

촛불이 타고 있는 동안은
이 환한 불빛에 기대리라.
심장이 타고 있는 동안은
이 따스한 온기에 기대리라.

촛불이 타고 있는 동안은
심장이 타고 있는 동안은
결코 결코 기도하지 않으리라.

나 죽은 뒤, 나도 모르는
나의 기원만이 이승 저승
홀로 헤맨다 할지라도

내 심장 한 개의 촛불로 만들어
온밤내 태우기만 하리라.
결코 결코 기도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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