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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현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나에대한열정 2022. 1. 9.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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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현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박우현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p. 17
꺽지

그는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닮았다
그는 싸움을 잘한다, 물고기의 왕이다
그는 먹이를 위하여 서둘지 않는다, 어슬렁거린다
그는 죽은 것을 결코 먹지 않는다, 차라리 굶어 죽는다
그는 고독하다, 늘 혼자다
그는 고독하지 않다, 고독마저 권태로울 때
큰 입으로 하품할 뿐이다.

아니 아니, 그는 어느 사내를 닮았다.
꿈은 잃어버리고
땅콩 껍질 같은 욕망만 남아
쓸쓸해 하는

 

 

p. 34~35
양산에 대하여

남자들은 왜 양산을 쓰지 않을까?
금남금녀의 구별이 사라진 시대에
귀걸이 목걸이 다 하면서
화장 다 하면서
덥다고 난리치면서
에어컨 펑펑 틀면서
선크림 떡칠해 바르면서
얼굴 검게 탈까봐 여자들 이상으로 신경 쓰면서
참 이상하다.

비 오면 우산 쓰듯이
햇빛 나면 양산 쓰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
그런데 왜 남자들은
양산을 쓰지 않는가?
쓰지 못하는가?
혹은 누가 쓰지 못하게 하는가?

오늘도 우산 겸용 양산을 쓰고 거리를 걷는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묘하게 웃는다
못마땅한 표정이 훨씬 더 많이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이 더운 여름에 양산을 쓰고 다닐 것이다
양산의 장점을 10개는 충분히 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일단 시원하고
얼굴이 타지 않고
스콜 같은 소낙비에도 우산 걱정할 필요 없고
칙칙한 선크림의 사용을 줄일 수 있고
땀을 적게 흘리니 옷을 덜 버리고
하여 세탁기나 에어컨의 사용이 줄 것이고
그러면 전기료가 적게 나와 경제적이고
당연히 이산화탄소 배출이 줄 것이고
아울러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때로는 좀 보고 싶지 않은 분 얼굴까지 가릴 수 있으니······

 

 

p. 41~42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이십대에는
서른이 두려웠다
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 있었다
마흔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삼십대에는
마흔이 무서웠다
마흔이 되면 세상 끝나는 줄 알았다
이윽고 마흔이 되었고 난 슬프게 멀쩡했다
쉰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이 되면 쉰이 그러리라
일흔이 되면 예순이 그러리라.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
모든 나이는 꽃이다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p. 44~45
몸살로 누워 있다가

몸살이라는 단어는 있는데
마음살이라는 단어는 왜 없는 것일까

음양의 이치로 보나
조어법으로 보면 의당 있을 것 같은데
처음부터 만들어지지도 않은 것 같다
이상하다
하여 이렇게 쓰고 싶어졌다

삶이 변비 걸릴 때 마음살 나겠지
스트레스가 이명처럼 떠나지 않을 때 마음살 나겠지
젊은 백수들 비라도 내리면 마음살 나겠지
생이별하고 사랑이 조각나면 마음살 나겠지
그리워도 전화조차 하지 못하면 마음살 나겠지
시 한편이라도 잘 써 보고 싶은데 죽어라 쓰여지지 않으면
마음살 나겠지
이렇게 마음살 나면 마음져누우리라.

 

 

p. 46
사랑은

사랑은 허기지다
사랑은 허랑하다
사랑은 허망하다
사랑은 허룩하고 헐렁하다
사랑은 허방지고 허방치다
사랑은 허름하고 허술하다
사랑은 허부룩하다 허우룩하다 허우적대다 허전하다
허출하다 허단하다 허허롭다 허허거리다 헉헉대다 헐떡이다 헛물켜다 헛방놓다 헛보다 헛되다 헛잡다.
허나 사랑은 불꽃보다 홧홧하여 이들 위에서 꽃뱀 혀처럼 날름거리고
갈증하여 반짝이는 강물처럼 이어진다.

 

 

p. 47~48
아름다운 시절


비가 설레임으로 다가오는 때가 있었다
장마 속 소나기가 좋을 때가 있었다
일 년 내내 비가 와도 좋을 때가 있었다

그럴 제 여름에 내리는 비가 얼마나 싱그러운지
비 맞는 나무는 얼마나 관능적인지
눈을 감으면 귀가 즐겁고
눈을 뜨면 눈이 즐겁고
우산을 쓰고 커피를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면
온몸과 오감이 즐거웠다.

비는 가로등불이 켜져도 계속 내렸다
슬며시 황혼병이라도 찾아들고
좋아하는 이들 곁에 있어
노르스름하게 익은 돼지 막창을
청량고추 가득 넣은 막장에 찍어
살얼음이 된 이 시린 소주 한 잔 걸치면
열락悅樂이 따로 없었다.

 

열락: 悅 기쁠 '열', 樂 풍류 '락'

1. 기뻐하고 즐거워 함

2. 유한한 욕구를 넘어서서 얻는 큰 기쁨

 

 

p. 58~59
무표정한 얼굴을 위한 변명

무표정하다고 비난하지 마라
진딧물에 둘러싸인 식물 같은 얼굴보다 낫지 않은가
무지 슬픈데
견디기 힘든 나날인데
그것을 얼굴에 줄줄 흘리고 다닐 순 없으니
인상만 쓰고 살 수는 없으니
표정 관리도 하고 세상 살아야 하니
별일 없는 듯 어울려야 하니
아무렇지 않은 척 세월 보내야 하니
그렇다고 억지로 낄낄대며 살 수는 없으니
위선 떨며 살기는 싫으니
플러스 마이너스 합이 제로가 되듯이 무표정한 얼굴이 되는 것
그러니 무표정한 얼굴도 참 인간다운 얼굴 아닌가
눈물나게 노력하는 얼굴 아닌가
비온 날 종일 굶은 길고양이 같은 얼굴보다 낫지 않은가
그러니 너무 나무라지 마라
그도 용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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