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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즐거운 일기> 1984
최승자 <즐거운 일기> 1984
p. 33~34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p. 35~36
연습
한참 자고 일어나 보면
당신은 먼 태양 뒤로 숨어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어 얼마 뒤, 불편한 안개 뒤편으로
당신은 어 엉거주춤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낯설게
시체 나라의 태양처럼 차갑게.
난 그 낯설고 차가운 열기에
온몸을 찔리며 포복한 채
당신에게로 기어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거북스런 안개가 걷히고
당신과 나는 당당하게 서로를 바라본다.
그때 당신이 또 날 죽이려는 음모를 품기 시작한다.
뒤에다 무엇인가를 숨기고서
당신은 꿀물을 타 주며 자꾸만 마시라고 한다.
나는 그게 독물인 줄 알면서도 자꾸만 받아 마신다.
나는 내 두 발이 빠져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빠져 들어간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장난이
내게는 얼마나 무서운 진실인가를 모르는 체한다.
당신이 모르는 체하는 것을 모르는 체하면서,
내가 자꾸 빠져 들어가는 게 나의 사랑이라는 것을 당신은 모르고, 모르는 체하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딧물이 벼룩을 낳고 벼룩이 바퀴벌레를 낳고 바퀴벌레가 거미를 낳고······
우리의 사랑도 속수무책 거미줄만 깊어가고,
또 다른 해가 차가운 구덩이에 처박힌다.
p. 38
한 목소리가
한 목소리가 허공에 숨어 있다.
눈빛을 반짝이며 십 년을
숨어 떠돌던 목소리,
언젠가 누군가의 베개맡에서
사랑해라고 말했던 목소리.
이윽고 말갛게 씻겨져나간
백골의 추억으로 그대는 일어선다.
그대의 비인 두 눈구멍을 뚫고
두 줄기의 바람이 불어 간다.
뼈의 기타 가락이 별빛처럼 부서지며
별빛 같은 물이 흘러나오고
한번 스쳐가는 바람의 활에도
석회질의 추억은 맑게 울리며
홀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바다 위의 내 집에는
흰 파도의 침실이 하나······
p. 47
즐거운 일기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렉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악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 몰래 일 센티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았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p. 51
여성에 관하여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p. 93
악순환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겐 공포였다.
나는 독 안에 든 쥐였고,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였고,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세계가 나를
잡아먹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오 한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p. 97~98
삼십삼 년 동안 두번째로
삼십삼 년 동안 두번째로 나는
나로부터 도망갈 결심을 한다.
우선 머리통을 떼내어
선반 위에 올려놓는다.
두 팔과 두 발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몸통을 떼내 의자에 앉힌다.
오직 삐걱거리는 무릎만으로 살며시 빠져나와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오래 달리고 달려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
가만히 쉬고 싶을 때,
저 앞에서 누군가가 걸어간다.
그에게 달려가 동정을 구한다.
그 품에서 잠시만 쉬게 해달라고.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 품에서
가볍게, 풍선에서 공기 빠지듯
가볍게 죽게 해달라고,
그는 못 들은 체하며 걷는다.
나는 또 다시 그에게 동정을 구걸하고
이윽고 마지못해, 귀찮다는 듯
그가 나를 뒤돌아볼 때
그것은······
짓뭉개져버린 나의 얼굴.
※최승자 시인의 다른 작품
2022.01.06 - [북리뷰/문학반] - 최승자 [기억의 집]
2022.01.04 - [북리뷰/문학반] - 최승자 [빈 배처럼 텅 비어]
2022.01.01 - [북리뷰/문학반] -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시인의 첫 번째 시집
2021.12.30 - [북리뷰/문학반] - [쓸쓸해서 머나먼] 최승자
2021.12.27 - [북리뷰/문학반] -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 그만 쓰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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