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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랑노래] 신경림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1. 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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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2013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2013

 

 

p. 9~10
너희 사랑 - 누이를 위하여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자잘한 낙서에서 너희 사랑은 싹텄다
흙바람 맵찬 골목과 불기 없는
자취방을 오가며 너희 사랑은 자랐다
가난이 싫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반 병의 소주와 한 마리 노가리를 놓고
망설이고 헤어지기 여러 번이었지만
뉘우치고 다짐하기 또 여러 밤이었지만
망설임과 헤매임 속에서 너희 사랑은
굳어졌다 새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깊어졌다
돌팔매와 최루탄에 찬 마룻바닥과
푸른옷에 비틀대기도 했으나
소주집과 생맥주집을 오가며
다시 너희 사랑은 다져졌다
그리하여 이제 너희 사랑은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처럼 눈에 익은 너희 사랑은
단비가 되어 산동네를 적시는구나
훈풍이 되어 산동네를 누비는구나
골목길 오가며 싹튼 너희 사랑은
새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깊어지고 다져진 너희 사랑은

 

맵찬 - 맵차다: 맵고 차다, 옹골차고 야무지다.(옹골차다: 실속이 있게 속이 꽉 차 있다)

 

 

p. 15~16
새벽달

돌 깨는 소리 멎은 지 오래인
채석장 뒤 산동네 예배당엔
너무 높아서 하느님도 오지 않는 걸까
아이들과 함께 끌려간 전도사는
성탄절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블록 담벼락에 그려진
십자가만 찬바람에 선명하다
눈도 오지 않는 성탄절날 새벽
복받은 자들만의 찬송가 소리는
큰 동네에서 큰 교회에서
골목을 타고 뱀처럼 기어올라와
가난을 어리석음을 비웃고 놀리는데
새벽달은 예배당 안을 들여다보는구나
갈 곳 없이 시멘트 바닥에
서로 안고 누운 가난한 연인들을 깨우면서
저 찬송가 소리 산동네 덮기 전에
일어나라고 일어나라고
가만가만히 흔들어 깨우면서

 

 

p. 32~33
가난한 사랑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법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벙대원이 순찰을 돌다가 손에 든 순찰봉을 딱, 딱 두번 두드려서 새벽 2시를 알리는 소리를 말한다.

 

 

p. 56~58
강물을 보며

어떤 물살은 빠르고
어떤 물살은 느리다
또 어떤 물살은 크고
어떤 물살은 작다
어떤 물살은 더 차고
어떤 물살은 덜 차다
어떤 물줄기는 바닥으로만 흐르고
어떤 물줄기는 위로만 흐른다
또 어떤 물줄기는 한복판으로만 흐르는데
어떤 물줄기는 조심조심
갓만 찾아 흐른다

뒷것이 앞것을 지르기도 하고
앞것이 우정 뒤로 처지기도 한다
소리내어 다투기도 하고
어깨와 허리를 치고 때리면서
깔깔대고 웃기도 한다

서로 살과 피 속으로 파고들어가
뒤엉켜 하나가 되기도 하고
다시 갈라져 따로따로 제 길을 가기도 한다
때로 산골짝을 흘러온 맑은 냇물을 받아
스스로 큰물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온 더러운 물을
동무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다리 밑도 지나고 쇠전 싸전도 지난다
산과 들판을 지나고
바위와 돌틈을 어렵사리 돌기도 한다
그러면서 모두 바다로 간다

사람이 사는 일도 이와 같으니
강물을 보면 안다
온갖 목소리 온갖 이야기 온갖 노래
온갖 생각 온갖 다툼 온갖 옳고 그름
우리들의 온갖 삶 온갖 갈등
모두 끌어안고 바다로 가는
깊고 넓은 크고 긴 강물을 보면 안다

 

쇠전: 소를 사고파는 장

싸전: 쌀과 그 밖의 곡식을 파는 가게

 

 

p. 59~60
산에 대하여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 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 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지는
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짐즛: '짐짓'의 옛말 (짐짓: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으나 일부러 그렇게,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곤줄박이 : 박샛과의 새

개개비: 휘파람샛과의 새

 

 

차례대로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이미지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p. 73
봄의 노래

하늘의 달과 별은
소리내어 노래하지 않는다
들판에 시새워 피는 꽃들은
말을 가지고 말하지 않는다
서로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듣는다
달과 별의 아름다운 노래를
꽃들의 숨가쁜 속삭임을
귀보다 더 높은 것을 가지고
귀보다 더 깊은 것을 가지고

네 가슴에 이는 뽀얀
안개를 본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듣는다
눈보다 더 밝은 것을 가지고
가슴보다 더 큰 아픔을 가지고

 

시새워: 시새우다 - 자기보다 잘되거나 나은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고 싫어하다. 남보다 낫기 위하여 서로 다투다.

 

 

p. 89
오월은 내게

오월은 내게 사랑을 알게 했고
달 뜨는 밤의 설레임을 알게 했다
뻐꾹새 소리의 기쁨을 알게 했고
돌아오는 길의 외로움을 익게 했다
다시 오월은 내게 두려움을 가르쳤다
저잣거리를 메운 군화발 소리 총칼 소리에
산도 강도 숨죽여 웅크린 것을 보았고
붉은 피로 물든 보도 위에서
신조차 한숨을 쉬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오월에 나는 증오를 배웠다
불 없는 지하실에 주검처럼 처박혀
일곱 밤 일곱 낮을 이를 가는 법을 배웠다
원수들의 이름 손바닥에 곱새기며
그 이름 위에 칼날을 꽂는 꿈을 익혔다
그리하여 오월에 나는 복수의 기쁨을 알았지만
찌른 만큼 찌르고 밟힌 만큼 밟는 기쁨을 배웠지만
오월은 내게 갈 길을 알게 했다
함께 어깨를 낄 동무들을 알게 했고
소리쳐 부를 노래를 알게 했다

 

곱새기며 - 곱새기다: 되풀이하여 곰곰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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