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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격을 얻어] 이혜미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2. 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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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 <빛의 자격을 얻어> 2021

 

 

이혜미 <빛의 자격을 얻어> 2021

 

 

 

p. 17
빛멍

돌이켜보아도 무례한 빛이었다. 최선을 다해 빛에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길이었다. 응고되지 않는 말들, 왜 찬란한 자리마다 구석들이 생겨나는가. 너무 깊은 고백은 테두리가 불안한 웅덩이를 남기고. 넘치는 빛들이 누르고 가는 진한 발자국들을 따라. 황홀하게 굴절하는 눈길의 영토에 따라. 지나치게 아름다운 일들을 공들여 겪으니 홀로 돋은 흑점의 시간이 길구나. 환한 것에도 상처 입는다. 빛날수록 깊숙이 찔릴 수 있다. 작은 반짝임에도 멍들어 무수한 윤곽과 반점을 얻을 때, 무심코 들이닥친 휘황한 자리였다. 눈을 감아도 푸르게 떠오르는 잔영속이었다.

 

휘황한 - 휘황하다: 광채가 나서 눈부시게 반짝이다. 행동이 온당하지 못하고 못된 꾀가 많아서 야단스럽기만 하고 믿을 수 없다. /유의어: 눈부시다. 현란하다. 휘황찬란하다.

 

 

p. 25~26
시나몬에 대해서라면

그건 둥글게 흐르고 있었지
단단한 표피를 두르고
우리에게서 멀어질 때

독사들의 골짜기를 지나
나무의 페이지를 찢어 말리면
미지의 향신료가 탄생하고

죽은 나무와 거미줄
얼음과 웅덩이
창백한 뱀으로 변하는 자작나무와
밤마다 새로 짠 수의를 갈아입는 호수처럼

너는 곁에 없는 모든 것

그림자를 잘 개어 놓아두고
먼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죽은 몸 그대로 근사한 관이 되려고

단단한 두루마리를 펼쳐
한 방향으로 풀리는 마음을 겪을 때

사라져 더 가까워진 향들이 있었지

시나몬에 대해서라면
그건 은밀해진 나무의 순간이었다고

 

 

p. 35
삭흔

가장 아름다울 때 가장 슬픈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오늘은 달무리를 떠나왔고 아침에 못다 쓴 눈보라에 집중했다. 교차하던 밤과 낮. 기만과 거짓. 목을 다정하게 조여오던 손에게 더없이 친절해지던. 밤의 가장자리로 엎드리며 나는 순한 목소리가 되고 싶었다. 무해한 찰나의 지저귐으로 기울어가고 싶었다. 돌아서서 걷던 뒷모습으로. 단정한 등의 단면으로. 그러나 지금은 어지러운 거짓의 무늬를 더듬으며 분명해지는 시간. 어제의 뜨거웠던 손이 폭설을 모아 올 수도 있다. 서로의 급소를 짓누르며 무한을 말하였고 그건 순환하는 비명들 같았지. 계속해서 가까워지다 영영 멀어지는 수평선처럼. 빛나는 꿈을 목에 두르고 밤하늘로 쏟아질 수도 있다. 그리하여 맡아두었던 겨울이 매달린 이의 더러움을 환하게 비출 수도 있다.

 

삭흔: 끈이 목 부위를 압박하여 피부에 형성된 압박흔 또는 압박성 피부 까짐. 목맴에서 가장 중요한 소견이다.

 

 

p. 63~64
종이를 만지는 사람

당신은 지나치게 조심히 걷는군요.
나무를 꿈꾸게 하려고.

오늘 쓴 편지들이 숲의 어깨에 엉켜 있네요. 이면지 위를 걷다가 보았습니다. 폭설에 물든 흑목련 나무가 바닥에 새까만 꽃잎들을 엎질러둔 것을. 그건 문장에 망설임을 담는 방식입니다.

차이와
간격에 대한.

나무는 눈멀어 자신에게로 잠겨들지만, 그는 잎사귀의 눈꺼풀과 내뻗은 가지로 세계를 다시 얻지요. 눈송이들이 손끝에서 태어나듯이.

저녁을 천천히 더듬으면 낯익은 별들이 떠오르고··· ··· ··· ··· 한 번의 스침으로도 생겨나는 마음의 요철들. 그 짤막한 배열의 모스부호들을 건져내려 눈을 감습니다. 나무의 속내까지 몰려드는 새로움을 흰 점자들로 이루어진 백지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흑목련의 기억을 일깨우는 지금, 당신은 종이를 만지는 사람입니다. 종이에게 경험을 주려 오래도록 걷는 사람입니다. 소용돌이치던 나무의 기별들이 갈피마다 쏟아지네요. 

정든 파본처럼.

 

 

p. 66~67
물에 비친 나무는 깨지기 쉽습니다

당신은 숲으로 돌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숲으로······

찢어진 나무들로 눈앞이 자욱해지고
상처에서 옛날이 흘러나옵니다

사람 아닌 것만을 믿으며
걸음을 잘게 나눠 디디며

······숲으로

겨울을 돌아 나온 빛의 부스러기처럼
오래도록 되풀이될 여행일 것을 알아서
영혼은 낡고 더러운 몸을 끝내 벗지 못합니다

비밀을 기록하는 뿌리의 집요함으로
실패한 속삭임이 드넓게 자라납니다

표정을 빌려줄게요
수치를 모르는 늦여름 호수처럼

어긋났던 전생을 되새길 때
자주 들여다본 거울은 조금씩 멀어집니다

숲에는 오래된 열쇠들이 꽂혀 있습니다
땅의 문을 열기 위하여

 

 

p. 68~69
인그로운

고백하자면 머리 없는 아침이 필요한 것

이를테면 이런 위로
"본인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우유  속의 칼, 잠옷 속의
바늘처럼
적절한 보상에 대해 고민하고

아물어가는 구석에 대해 골몰할 것

이 점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겨울 구근들의 의견을 참조할 것

굴다리와 버려진 인형에 관한 기록을 살펴볼 것

"겨우 이런 사람이라 미안해"
그런 말은 복수의 무늬라 여기며
가능한 차분하게 공복의 상태를 유지할 것

뾰족한 것을 만지기를 삼가되
불안과의 저녁 약속에 늦지 않도록 신경 쓸 것

 

인그로운: ingrown을 발음해 놓은 것. 살로 파고든, 안쪽으로 성장한, 천성의, 내향적인의 의미.

구근: 지하에 있는 식물체의 일부인 뿌리나 줄기 또는 잎따위가 달걀 모양으로 비대하여 양분을 저장한 것. / 같은 말: 알뿌리

 

 

p. 88
눈빛이 액체라면

그 얼굴에 장마 지겠지. 목을 따라 흘러 무릎을 적시며, 마르지도 못하는 마음들. 섞이기에 두려운 순간들. 경계마다 고여드는 숨방울. 눈을 타고 흘러온 빛에 발끝까지 온통 젖겠지.

시선이 행성이라면 중력을 잃은 별, 서로를 향해 출발하는 빛이겠지. 한번 출발한 눈길은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이의 외계를 떠도니. 눈꺼풀 안쪽에 달라붙은 암흑을 봐. 조금씩 나누어 마셔야 하는 파문도 있고 다시 되감을 수 없는 눈썹도 있지.

찢어진 깃발들, 하얗게 식어가는 눈짓들. 어긋난 약속을 교환하던 밤은 호흡을 더욱 작은 조각들로 흩어놓았고. 기다리는 것은 멀리의 걸음들을 애써 미리 겪어보는 일이었는데. 마음이 기체라면 그 발길마다 내내 폭풍우들겠지. 젖어드는 눈시울의 물기를 엮어 투명한 직물을 잣는다면, 그 천을 걸치고 사람의 온도에 눈 머는 이도 있으리.

 

 

p. 100
닫힌 문 너머에서

곁을 비우며
멀어지는 손끝처럼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고 그 문을 떠날 때

우글거리겠지, 썩고 마르고 흐르고 무뎌지겠지, 사그라들다 환해지겠지, 먼지를 품겠지

새로 지은 어둠을 선물하면
오래 닫아둔 문 뒤는 흑백이 우거지는 입체가 된다

약속이 저마다의 문이라면 모두가 열쇠를 내버리고 함몰하는 방들

겹겹의 미로 속에서
오랜 다짐이 무너진 뒤에야 짐작 하지
닫힌 눈꺼풀이 몸이 가장 어두운 뒷면이었음을

 

 

p. 104~105
겨울 가지처럼

안으로 흘러들어
기어이 고였다

온통 멍으로 출렁이던 몸
두려움에 독주머니를 가득 부풀린
괴이하고 작은 짐승

가지꽃이 많이 피면 가문다더니
손가락으로 열매를 가리키면
수치심에 겨워 낙과한다니

몸속에 위독한 가지들을 매달고
주렁주렁 걷는 사람에게
고결은 얼마나 큰 사치인가

숨기려 해도 넘쳐 맺히는
시퍼런 한때가 있어서

찢어진 가지마다 심장이 따라붙어
우리는 모서리를 길들이기로 했다

한 바구니 두 바구니 수북이 따서 모은
열매들의 참담을 생각하면
부푸는 속내와 어두운 낯빛 사이에
물혹 같은 곤란함이 도사리는데

겨울 가지는 삶아놓으면 더 푸르러지고

푸르다는 건 내부에 멍이 깊은 병증이라
피부 밑으로 서서히 들이치는 겨울
가지의 색

 

 

p. 116~117
01

식물이 떠난 자리에선 무성한 포기의 냄새가 피어났다. 홀로에게 들려준 귓속말이 한쪽 날개를 접고 잠겨들 때 목소리들이 다시 찾아올 화단이 되고 싶었어.

두꺼운 이불 아래에서 서로를 만지며 몸을 눈치채던 겨울이었지. 가능한 온도와 불확실한 입술 중 너는 어느 쪽이었을까. 우리의 이야기는 추운 창을 사이에 두고 나눈 손가락 대화 같았어. 흐르며 떠도는. 글자들에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릴 때 넌 그걸 지나온 미래들이라고 불렀지.

우편함에 방금 만든 눈사람을 놓아두고 추운 방으로 돌아가던 사람을 생각해. 녹아가는 동시에 발견되고 싶었던. 00. 01. 손바닥에 뜻 모를 숫자들을 그려주던 시간. 하지만 이제 마른 꽃의 일은 무릎에게. 오늘 저녁의 일은 폭설에게 묻기로 했지.

눈사람은 왜 발이 없을까. 얼어붙은 오르막을 걸으며 중얼거린다. 떠날 필요가 없으니까. 이어폰을 끼면 음악이 출구를 몰라 떠돌듯 눈사람의 걸음은 자신 안에서 한없이 무수해진다고.

부름에 물음을 더하면 약속이 된다고 믿었는데. 귓속에 심어두었던 목소리들이 녹아들면 멈춰 서서 몸의 모서리가 짓무르기를 기다렸다. 얼어서 투명해진 화초의 발처럼. 영영과 영원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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