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때때로 캥거루] 임지은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1. 28.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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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은 <때때로 캥거루> 2021

 

 

임지은 <때때로 캥거루> 2021

 

 

 

시인 임지은은 대전에서 태어나, 2015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무구함과 소보로」가 있다.

 

 

P. 9~10
웃음의 진화

코미디 프로를 봅니다. 우리가 같은 프로를 보는 게 맞나? 할 정도로 너와 나의 웃음 포인트가 다릅니다. 웃음은 만국 공통이라던데, 웃는 얼굴에는 침도 뱉을 수 없다던데

웃을 수 없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를 풀기로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웃어야 할까요?

① 아끼던 반지를 저금통에 빠뜨렸습니다
② 저금통 배를 갈랐는데 반지가 없습니다
③ 사실 아꼈던 건 저금통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배꼽이 빠지도록 웃고, 너는 웃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너와 나는 다릅니다 다르니까 사랑하는 거지, 같아지려고 애써보는 거지

웃음이 진화하면 사랑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모두 울고 있습니까?

너무 사랑해서 웃음을 아끼고 있는 겁니다

 

 

P. 25~27
죄가 아니다

전화벨이 울린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는다
전화를 받기 싫은 건 죄가 아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수가
두 손을 합친 것보다 많다
손가락이 열 개뿐인 건 죄가 아니다

친구는 태어난 적 없다
혼자 있다
친구가 태어나지 않은 건 죄가 아니다

마음은 사전 속에 있다
[명사] 찾으면 사라지는 공간
마음이 바깥에 없는 것은 죄가 아니다

가까운 약국은 문을 닫았다
먼 곳까지 가서 두드렸다
문이 열리지 않는 건 죄가 아니니까

갈 곳이 없다
갈 곳이 있다면 죄가 사라질까
갈 곳이 없다는 게 죄는 아닐까

당신은 당신인 게 나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나인 게 죄 같았다

연락이 되지 않으니까
마음이 빵 봉지처럼 벌어졌으니까
늦은 밤마다 약국에 가고 싶으니까

귀가 아플 때 먹는 약 좀 주세요
제 이름이 듣기 싫습니다

내가 나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선생님은 입술에 달라붙은 선의를 떼어냈다

내가 삼킨 건 부르고 싶은 이름일 뿐이었는데
모든 것이 죄가 되었다

버스를 타고 용서를 구하러 가야지
창밖으로 무해한 불빛을 세야지

이 불빛이 끝나는 곳에 문을 연 약국이 있다
죄가 아닌 마음이 있다
바깥으로 만든 사전이 있다

 

 

P. 35~37
때때로 캥거루

새로운 땅에 도착한 사람들이 물었다
저 동물의 이름이 뭡니까?

간단한 차림의 원주민이 말했다
캥거루?

주머니가 있는 동물이었다
캥거루의 정체성은 다름 아닌 주머니에 있었다

가끔 주머니 없는 캥거루가 태어나기도 했다



궁금한 게 있었다
너는 모른다고 했다

몰라는 주머니가 있는 동물이 아니었지만
뭔가 담아야 할 것 같았다

고민을 눌러 담자 토끼가 튀어나와 귀를 접었다
몰라의 정체성은 모르는 것에 있었다

가끔은 알아도 모른 척해야 했다



여기가 어디죠?
차에서 내려 물었다

다름 아닌 여기죠
주머니가 있는 대답이었다
가까운 곳과 먼 곳이 불룩해지는

나는 몰라입니다
때때로 캥거루입니다

고민만큼 뛰어오르길 즐기다
높이뛰기 선수가 되어버린 캥거루

주머니 없는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맨발을 신은 채 도망치고 싶은 캥거루

그러다 무릎이 까져도 좋았습니다

잘 알기 위해서 
조금은 모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일어서기 위해선 먼저 넘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P. 43~45
감정 교육 뉴스

우리 사회에서 가정교육은 항상 중시되어왔습니다
어떤 게 진짜 감정인지 알 수 없을 땐 엄마에게 물어보면 좋은데요
엄마는 많은 것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대기 기자와 연결해보겠습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모두 널 위한 거야 너도 크면 이해할 거다"

저는 엄마와 아들이 싸우는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아들인 이 모 씨는 엄마가 정해주는 감정에 따르지 않겠다는 입장인데요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했는데 행복하지 않아요
행복은 엄마가 했겠죠"

감정 전문가와 연결해보겠습니다

"감정을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면
평소에 감정을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한편, 감정을 느껴보려는 이가 많아지면서 한 제약 회사는 감정 치약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감정 치약을 칫솔에 묻혀 닦아주기만 하면 되는데요
치약 속 감정 유발 물질이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럼 제가 한번 닦아보겠습니다

"야, 이 씨!"
(카메라가 꺼진다)

나는 뉴스를 끄고
행복, 안도, 불안, 기쁨, 착잡, 초조, 허무, 답답, 실망, 섭섭, 끔찍, 기대, 들뜸, 민망, 미묘, 편안, 이질, 동질, 경이, 흥미, 재미, 괴리, 당혹, 충격, 심드렁 속에 있었다

감정은 입구와 출구가 멀었다
한참을 달려도 나갈 곳을 찾지 못했다
나는 안에 있었다

감정이 있었다

 

 

p. 54~55
비싸지?

냉동된 떡을 전자레인지로 데운다
떡이 따뜻해서 좋구나
전자레인지는 참 좋은 물건이다

근데 얘야, 좋은 것은 비싸지?

세탁기에서 나온 수건을 턴다
엄마는 손목이 예전 같지 않아서
할 수 없는 일이 늘어난다

근데 얘야, 통돌이는 싸도 전기는 비싸지?

검은 봉지로 채워진 냉동실을 연다
엄마, 만두는? 거기 검은 봉지
치킨은? 그 옆 검은 봉지
먹다 만 투게더는? 그 위 검은 봉지

꽁꽁 묶인 것을 풀어보려다
도로 넣은 것이
엄마와 나 사이엔 가득하고

너무 많은 것을 간직하려다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엄마는 물티수 한 장으로
식탁을 닦고
방바닥을 닦고 휴지통을 닦는다

다 컸단 사실을 잊고 가끔은 나도 닦는다

함께 있으면 시간이 잘 가지 않아서
각자의 방에 머문다

방문을 열어보면 엄마는 각종 영양제를
입안에 털어 넣고 있다
우리 사이에는 건강하지 못한 것이 많아서

엄마, 근데 그거 비싸지?

 

 

p. 56~57
신문지

깨진 유리컵을 신문지로 감쌌다
유리는 종이를 만나면
안전해졌다

어제 쓴 문장을 농담의 재료로 사용했다
실패한 문장이 많을수록
농담이 늘었다

나무와 철과 플라스틱 등받이가 적절히 배합된
의자를 쪼개고 나누면 재료가 되었다
합치고 조립하면
의자가 되었다

인간은 너무 많은 인간과 함께 있었다

나는 
인간을 신문지에 말아버렸다
인간을 농담의 재료로 이용했다

인간은 아무리 해도 인간이군요

하지만 그런 농담은 좀처럼 웃기지 않았다

 

 

p. 58~59
사람이 취미

사람을 취미로 해서
좋은 점은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깨진 접시는 상처를 주지 않아
케첩은 상처를 주지 않아
흰옷에 묻으면
눈에 띄게 빨갛긴 하지만

식후의 낮잠은 습관이 되고
마라톤은 기록이 되지만
사람이 취미가 되면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후후 불어 마시듯 사람이 되고
한여름 내리는 소나기만큼 사람이 된다

지구에서 태어난 사람은 한밤중이라
깨기는 쉽고 다시 잠들기는 어려우니까
맨손체조가 필요하다

사람이 직업인 사람은
리듬상의 이유로 온몸에 도돌이표가 많다

한밤중에 전화를 끊는 사람은
가끔 알약처럼
잘 삼켜지지 않으므로
머리맡에 물 한 컵이 필요하다

물은 서로를 밀어내고 있어서
사람이 아주 잘 녹는다

 

 

p. 80~81
인생의 밝은 면

정육면체는 여섯 개의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좋지도 싫지도 않은 일입니다
면이 늘어난다면
육면체를 벗어나게 됩니다

동그래져서 굴러가는 오렌지가 아닌 것들

인생도 여섯 개의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좋기도 싫기도 한 일입니다

긍정: 더울 때 에어컨을 켤 수 있다
부정: 에어컨이 없을 수 있다
다정: 부채를 빌려줄 수 있다
요정: 겨울을 가져올 수 있다
행정: 좀 복잡할 수 있다
결정: 선풍기를 틀 수 있다

주사위를 던져도 나오지 않는 스무 살처럼
아무리 찾아도 나에게 없는 면이 있고
그게 혹시 밝은 면은 아니었는지

불을 켜도 깜깜한 방에
위아래가 있고
옆이 있는 나에게
창문을 내고 싶습니다

늘어난 스웨터처럼 맞물리지 않는 모서리를 가진
창틀 사이로 오가는 대화란

만약에 말야······(가정) 들을 준비가 안 되었는데 (걱정) 잠깐 귀를 준비할게 (표정) 우린 아직 알아가는 중이지만 (과정) 너를 사랑해 (열정)

함정으로 가득하지만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은
밝은 면도, 어두운 면도 아닌
바로 웃긴 면입니다

 

 

p. 132
유머 있는 라이터

춤추는 사람은 낙관주의자입니다
문워크를 할 때조차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좋은 소설가는 날달걀입니다
중요한 순간 탁, 깨져야 하니까요

선생님은 노래방입니다
끝까지 듣지 않습니다

아이는 깜빡거리는 신호등입니다
다 건너지도 않았는데 어른이 되었습니다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습니다
분명 다 마른 거라고 했는데요?

엄마는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입니다
가끔은 말도 안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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