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좋은 날에 우는 사람] 조재도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1. 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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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도 <좋은 날에 우는 사람> 2007

 

 

조재도 <좋은 날에 우는 사람> 2007

 

 

 

 

p. 12~13
좋은 날에 우는 사람

슬픔의 안쪽을 걸어온 사람은
좋은 날에도 운다
환갑이나 진갑
아들 딸 장가들고 시집가는 날
동네 사람 불러
차일치고 니나노 잔치 상을 벌일 때
뒤꼍 감나무 밑에서
장광 옆에서
씀벅씀벅 젖은 눈 깜작거리며 운다
오줌방울처럼 찔끔찔끔 운다
이 좋은 날 울긴 왜 울어
어여 눈물 닦고 나가 노래 한 마디 혀, 해도
못난 얼굴 싸구려 화장 지우며
운다, 울음도 변변찮은 울음
채송화처럼 납작한 울음
반은 웃고 반은 우는 듯한 울음
한평생 모질음에 부대끼며 살아온
삭히고 또 삭혀도 가슴 응어리로 남은 세월
누님이 그랬고
외숙모가 그랬고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이 그러했을,
그러면서 오늘
훌쩍거리며
소주에 국밥 한 상 잘 차려내고
즐겁고 기꺼운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차일: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치는 포장 / 유의어: 차양

 

장광: 장독대

 

씀벅씀벅: 눈꺼풀을 움직이며 눈을 자꾸 감았다 떴다 하는 모양

 

채송화처럼 납작한 울음이라는 표현에 찾아보게 된 채송화. 높게 자라봐야 25~30cm정도.

 

p. 18~19
가만 있자 그러니까 그게 거, 할 때의 그 가만 있자에 대하여

어떤 말이 저렇게 깨달음의 등불을 오롯이 드러낼까
어떤 말이 저렇게 강물처럼 흘러 순간마다 빛날까
어떤 말이 늘 서서 걸으며 달려가는 우릴 멈추게 하겠는가
그 자리에 멈추어, 앉아, 되돌아보게 하겠는가
가만 있자의 그 순간이 어디
사람에게만 있겠는가
소주 집에 앉아 씩둑거리는 사람에게만 있겠는가
날아오를 자리 가늠하며 대가리 까대이는
미루나무 꼭대기의 저 까치에게도
주춤대며 개천 다리 건너오는
오늘 아침 샛강의 자욱한 안개에도
그러니까 그 자세 가만 있자의
낮은 걸음 자세는 깃들어 있는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한 순간 불타처럼 튀어나온 그 깨달음에
극極으로 치닫던 마음이 돌아앉는다
제 몸 진저리치며 세우는 그 자리에
고양이
쥐의 일에
슬퍼도 하고
밭에서 돌아온 소가
부어오른 제 발등을 핥기도 한다

어느 말이 저렇게 어두운 골방에서
맹렬히 타오르는 담뱃불이겠는가

 

씩둑거리다: 쓸데없는 말을 수다스럽게 자꾸 지껄이다

 

 

p. 26~27
자라

노인 병원 수족관에 자라 한 마리 납작 엎드려 있다
죽음을 앞둔 노인이 생의 주름 잔뜩 오므리고 누워 있듯 그렇게 누워 있다
거대한 층층의 현대판 고려장이다
모시기 마땅찮은 이들이 의논 끝에 이곳에 넣어 두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하루 ㅡ 반나절 ㅡ 30분이 이렇게 더디 간다
환자복 하나 안간힘 다해 휠체어 바퀴 한 번 밀어 3cm이동한다
다른 환자복 죽 한 그릇 삼키는데 삼천갑자 동방삭이다
삶은 어쩌면 처음부터 저렇게 느리게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빈손에 하얗게 굳어 있는 발바닥 삶이
코에 튜브를 낀 채 뒤집어져 있는 삶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라가 공기방울 밀어 몰리듯
아주 천천히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모른다
죽음 곁에 놓인 삶의 부스러기들
물티슈 크리넥스 화장지 오줌통 깎아 놓아 누래진 사과쪽들이
완강히 생의 끈을 잡고 놓지 않는 동안
아, 아프지 않고 살기가 저렇게 힘이 들까
나서 죽는 일이 저렇게 힘이 들어?
메마른 눈물인 듯 링거 액 아슬아슬히 떨어지고
있는 힘 다해 살아 있는, 허나 죽어 가는 사람들
형광등 불빛에 눈이 시린
수족관 칸칸마다 엎드려 있는
이따금 오래된 기억인 듯 손발 움직여 보는

 

삼천갑자 동방삭: 중국 전한의 동방삭이 갑자년을 삼천 번 겪으며 18만 살이나 살았다는 데서, 장수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여기서는 그만큼 긴 시간.(삼천갑자: 60갑자가 3천배, 18만년)

 

 

p. 30~31
아버지의 책

책을 읽듯이 아버지를 읽는다
아버지는 내가 모르는 아득한 옛날부터 이 책을 써 왔다
활자보다는 발자국이 더 많이 찍혀 있는 책
아버지의 책을 한 장 한 장 읽는다
밑줄 그은 자리마다 옛날의 기억들이 버섯처럼 돋아난다
눈물겹고 무식하고 애절하기도 한
때로 생각하기도 싫은 생의 버섯들
~에 태어났다, 는 첫문장을 지나
밤바다처럼 뒤척이는 젊은 날에 들어서면
아버지의 책도 덩달아 생의 절정에 오른다
거기 느티나무가 있는 산골 마을 어디쯤
젊은 어머니와 나와 우리 식구들의 앳된 삽화도 나오고,
책장을 넘기듯 세월은 또 그렇게
마른 빨래처럼 가볍게 흘러갔을 것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아버지의 책은 지리멸렬, 완강해진다
서랍 속 약봉지와 새벽 기침소리를 지나
어느덧 노인병원에 꽂혀 있는 아버지의 책에는
똑 똑 똑, 끊길 듯 끊이지 않는 말줄임표 가득하다
··· 와
··· 사이
침묵의 시렁에 꽂혀 있는 아버지의 책
이 책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나는 모른다
언제 완성되어 내 마음의 서재에 꽂힐지 나는 모른다

 

지리멸렬: 지支 가를 '지' / 리離 떠날 '리' / 멸滅 멸망할 '멸' / 렬裂 찢을 '렬' 

이리저리 흩어지고 찢기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음

 

시렁: 물건을 얹어 놓기 위하여 방이나 마루 벽에 두 개의 긴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든 것

 

시렁(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이미지)

 

p. 56
관계

건넛산 바라보며 대가리 까댁이는 저
새는 두려운 것이다, 울음
그친 채 비상 위해 한껏
다리 오므렸다 싶은 순간
날아올랐다, 파르릉!
기어코 세상에 든 것이다

이제 세상이 그를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p. 69
칠판

칠판처럼 마음이 암녹색일 때가 있다
칠판처럼 묵묵히 외로움일 때가 있다
한 마디 말 화살처럼
아이의 가슴에 금빛으로 떨어진다
분필가루처럼 날리는 말의 껍질이 싫어
서둘러 그 앞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앞에 다시 서기 위해
십 년을 고스란히 싸운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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