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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히스테리아] 김이듬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2. 1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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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히스테리아> 2014

 

 

 

 

 <히스테리아>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9
사과 없어요

아 어쩐다, 다른 게 나왔으니, 주문한 음식보다 비싼 게 나왔으니, 아 어쩐다, 짜장면 시켰는데 삼선짜장면이 나왔으니, 이봐요, 그냥 짜장면 시켰는데요, 아뇨, 손님이 삼선짜장면이라고 말했잖아요, 아 어쩐다, 주인을 불러 바꿔달라고 할까, 아 어쩐다, 그러면 이 종업원이 꾸지람 듣겠지, 어쩌면 급료에서 삼선짜장면 값만큼 깎이겠지, 급기야 쫓겨날지도 몰라, 아아 어쩐다, 미안하다고 하면 이대로 먹을 텐데, 단무지도 갖다 주지 않고, 아아 사과하면 괜찮다고 할 텐데, 아아 미안하다 말해서 용서받기는커녕 몽땅 뒤집어쓴 적 있는 나로서는, 아아, 아아, 싸우기 귀찮아서 잘못했다고 말하고는 제거되고 추방된 나로서는, 아아 어쩐다, 제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고, 그래 내가 잘못 발음했을지 몰라, 아아 어쩐다, 전복도 다진 야채도 싫은데

 

 

p. 14~15
데드볼

나빴던 적이 없습니다 나는
모가 난 순간도 없습니다
커브를 그리거나 직구로 가거나
묵직하게 굴러갈 때도
누군가를 해칠 의도가 없었습니다

다친 후 벤치에 앉아 있는 후보 선수처럼
실밥 아래 상처가 있어도
부르면 두말없이 살아납니다

손가락 끝으로 쥘 때도
몸 깊숙이 누군가를 맞힐 때에도
나는 당신의 확장된 몸
깨달을 수 없는 나의 진심

나를 죽은 공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전력으로 날아갑니다 나는 바로 그 지점
당신의 온몸이 우주의 한 점으로 모여 마주치는
찰나

담장을 넘어
두꺼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갑니다
붉은 실밥 사이로 날개를 꺼냅니다
터지는 환호성과 탄식으로 뒤범벅된 주말의 그라운드를 지나
전광판이 없는 시간 속으로
해변의 조약돌처럼 반짝거리며 시간의 잔물결 너머로

 

 

p. 24~25
권할 수 없는 기쁨

내 친구는 스피드광
오토바이 레이싱을 즐기는 사람
그런 그가 사고를 당했다
지리산을 한 바퀴 돌아 나한테 놀러 오겠다더니
자동차를 들이받아 오토바이는 박살났지만
자기 몸은 전혀 다치지 않았다며 껄껄 웃는다
하늘로 붕 날아오르는데 그물 같은 게 받쳐주는 것 같았다며
타고난 바이커란다

전화 끊고 저수지 주변을 서성거린다
수위를 조절할 수 있으면서도 열렬히
그런 건 없을까 피로 물든 바위를
고원의 당나귀든 상인의 낙타든 모래알에 이르도록 걸으리
묵직하게 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검은 얼음판 위에 앉아 있던 새
날개가 있는 슬픔

퇴화한 다리 아래
높은 곳으로 떨어져 죽어가는 예감
날 수 있어서
날아야 하니까
버려지지 않는 능력 때문에

 

 

p. 30~31
여파

외할머니가 죽자 보름도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도 따라가셨다
금슬이 남달랐든
나 때문이든
외가에 얹히는 게 싫었다
할머니가 마당에서 김장 배추 절일 때
지붕 위로 올라가 바라보던 들판
너머 먼 곳으로
구름 속에서 들린다
이 불쌍한 것
그렇게 부르지 좀 마세요
세수를 하는데 코피가 났다
피 한 방울 번지는 게 보기 싫었다
세숫대야 던져놓고
멈추지 않는 기침을
폐결핵 증세가 보이니까 가래를 받아 오라고 했다
잘 먹어야 한다며 의사가 웃는다
마루에 떠다니던 바이러스들이
대기에 가득한 불쌍한 것 내 새끼 불쌍한 것 그 음성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나한테 들어왔다
저기 환자분
이렇게 부르는 게 우스웠다
나만 특별하다는 생각을 버렸다
어마어마한 보균자들처럼
자기가 어떤 가능성을 가졌는지 모르는 채 사는 행운이 살짝 비껴갔을 뿐
발병했을 뿐

 

 

p. 65~67
빈티지 소울

카메라 대신에 벽돌입니다 상자를 여니 벽돌 반 장이 나왔어요 믿을 수 없지만 깨끗한 벽돌입니다 왜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아니라 벽돌인지 물어보려고 해도 연락두절이네요 인터넷 중고 시장을 통해 연결된 그 사람은 필름 10팩까지 끼워 거의 새것과 다름없는 카메라를 반값에 팔겠다고 했죠

힘주어 벽돌을 쥐고 흔들어봅니다 벽돌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섭니다 경찰서로 갈지 택배 송장에 적힌 주소지로 가야 할지 아직 모르겠어요

희미하게 어둠이 퍼져갑니다 보통 저녁입니다 골백번의 골백번 더 살아본 날입니다 어이없고 참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지만 똑같은 사기 사건도 수십만번쨉니다 사소한 사기가 삶이었지요 예전엔 나귀가죽하고 밀가루를 교환하다 시비가 붙어 칼에 찔려 죽을 뻔했습니다 금화 몇 닢 받은 후 양피지를 보내지 않은 적도 있구요

저 교회 벽돌도 내가 붙였습니다 나는 오랜전 애급에서 벽돌을 구워내던 노예. 무너지던 벽돌 더미에 깔려 죽었겠지요 나는 사기 치다가 걸려 톱니바퀴에서 고문당하던 상인, 콩고 강 하류에 던져진 번제물, 언덕 꼭대기 대성당에서 목탄으로 모작을 그리던 인부, 들판에서 나뭇잎으로 성기만 가리고 누워 행인을 기다리는 창녀였을지 모릅니다

내 영혼은 중고품입니다 수거함에서 꺼낸 붉은 스웨터처럼 팔꿈치가 닳고 닳은 영혼입니다 누군가 미처 봉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기억입니다 불현듯 바다에서 솟아올랐거나 화산에서 흘러내린 먼지입니다

때때로 나는 처음으로 근사한 말을 떠올리지만 그 문장은 이미 내가 사막에서 벽돌을 굽다 지루해서 돌 위에 새겼던 말입니다 어딘가 처음 가보아도 언젠가 꼭 와서 살았던 곳 같습니다 내게 처음은 없지만 매 순간 처음처럼 화들짝 놀랍니다

당신이 왜 떠났는지 압니다 비애와 슬픔의 차이도 알고 저 모퉁이에서 걸어오던 사람이 왜 나한테 눈을 흘기고 가는지도 압니다 똑같은 일을 수십만 번 겪었으니까요 벽돌이 내게 온 이 상황에 대해서도 분개할 만한 일종의 흥미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건망증에 미달하는 기억력 때문에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카메라를 받기도 전에 선입금했고 또다시 사람을 믿었습니다 다행히 내 기억은 내 영혼은 약을 쳐야 기어 나오는 벌레 같아서 마치 없는 것처럼 또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것입니다

 

애급: 이집트의 음역어(음역어: 한자음을 가지고 외국어의 음을 나타낸 말)

번제물: 구약 시대에, 제사를 지낼 때 통째로 태워 바치던 동물 또는 그런 제물

 

 

p. 82~83
노안이 오면

책도 신문도 읽을 수 없겠지
더 보고 싶겠지 내 얼굴의 주근깨도
결점이 없어지겠지
점점 번지겠지
사방으로 밀려 나가겠지
밝고 어둡고 윤기 나고 우울한 게 다르지 않겠지
윤곽이 허물어지겠지
울며 주저앉을 때도 있겠지
그래야 할 텐데
생은 저무는데
점점이 별들은 오류처럼 시행착오처럼 반짝이겠지
황홀할 일 없겠지
내가 왕년에는 예전에는 소싯적에는
더 이상 이런 생각 안 하겠지
촛불을 끄겠지
심지를 자르고 싶겠지
그림자로 분위기로 누군지 알겠지
목소리가 작아지겠지
추운 날 아침
누가 큰 소리로 불러도
단호하게 거부한다는 듯이
잠잠하겠지
아무 기척도 없이
별들은 떠 있겠지
반짝거린다고 믿겠지
소녀가 돌아보겠지
노안이 오면
겉과 속 없이
사람이 보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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