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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최정례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2. 1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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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례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2011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6~17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면 믿지 않겠지요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으니까요
캥거루가 새끼를 주머니에 안고 겅중겅중 뛸 때
세상에 별 우스꽝스런 짐승이 다 있네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긴 나도 새끼를 들쳐 없고
이리저리 숨차게 뛰었지만
그렇다고 내 속에 캥거루가 있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요
TV에서 캥거루가 권투를 하는 걸 보았어요
사람이 오른손으로 치면
캥거루도 오른손을 뻗어 치고
왼손을 뻗으면 다시 왼손으로 받아치고
치고 받고 치고 받고
사람이나 캥거루나 구별이 안 되더라구요
호주나 뉴질랜드 여행 중 느닷없이
캥거루를 만나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앞발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수도 있겠더라구요
나는 가끔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인데
캥거루 주머니에 빗물이 고이면 어쩌나 하는 식으로
우리 애들이 살아갈 앞날을 걱정하지요
한번은 또 TV에서
캥거루가 바다에 빠진 새끼를 구하려다
물속으로 따라가 빠져 죽는 장면을 보여주더라구요
그 주머니를 채운 물의 무게와
새끼의 무게를 가늠하다가
꿈에서는 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지요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한밤에 이렇듯 캥거루 습격을 당하고 나면
영 잠이 안 오지요
이따금
캥거루는 땅바닥에 구멍을 판다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그 구멍으로 아무것도 안 한다네요
나도 쓸데없이 구멍을 파고
아무것도 안 하게 되네요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p. 30~31
당신을 이해해

그들은 방아를 찧고 있었다
닭은 부리를 내밀고
강아지는 주저앉고
오리는 엉덩이를 흔들며
여인의 방아 찍는 장단에 맞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꼭 국어책 크기만 한 흙 마당이었다
개와 오리와 닭과 여인
맷돌과 디딜방아
그들은 한식구가 되어
소꿉장난처럼 지내고 있었다
한나라 때의 무덤에서 나온 토우라고 한다
맷돌에서 곡식 가루는 쉬지 않고 흘러내리고

침묵은 그 세상에서 어떤 말보다 적합한 노래
이해란 제 속에서 솟는 샘물을 길어
서로에게 부어주는 것
개와 닭과 여인과 맷돌이
이 모든 것 죽어서야 이해하게 되었다는 듯이

 

주억거리고-주억거리다: 고개를 앞뒤로 천천히 끄덕거리다

토우: (역사) 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의 상. 종교적, 주술적 대상물, 부장품, 완구 따위로 사용하였다.(부장품: 장사 지낼 때, 시체와 함께 묻는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

 

 

p. 38~39
얼룩덜룩

말해볼까, 말해도 될까?
망설이는 사이
그는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고
나는 내려가고 있었다
층계를 바꿔 타고 뛰어올라갈까
분명 그 얼굴인데

어깨는 가라앉고 몸통은 굵어졌고
무엇보다도 다른 표정의 인간이 된 그
그가 쥔 비닐 봉투 속에
우루사 약 상자가 흔들리며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
봄볕 받아 길에 누운 나무 그림자
그림자 밟고 지나가면
잠시 내 몸에 얼룩덜룩 올라섰다가
에라 모르겠다
다시 눕는 나무 그림자처럼

이런 생각은 길 위에서나 잠깐
잠깐 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가던 길이나 가는 거겠지

종이컵에 빨대 꽂아 커피나 주스를 빨면서
빈 컵 바닥을 빨대로 더듬다가
마지막 공기 빠지는 소리 들리면
컵 구겨 내던져버리면서

 

 

p. 85~86
한 줄기 넝쿨이

어항 속의 물고기를 사람이 들여다본다고 해서
물고기가 사람의 실내를 들여다본다고 할 수는 없다

창을 기어오르다 디딜 곳을 놓친
담쟁이넝쿨 한 줄기가 창가에 걸쳐 있다
실내를 들여다본다? 아니다

나는 콩을 까고 있다
껍질은 왼쪽에 놓여지고
콩은 오른손에 잠깐 들려 있는가 싶더니
바구니에 담긴다

손이 콩의 무게를 느낄 수 없다고 해서
콩에 무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들여다보는 것을 느낄 수 없다고 해서
들여다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콩이 튀어 식탁 밑으로 달아나고
한 줄기 넝쿨은 거꾸로 매달린 물음표 모양으로
실내를 들어 올리며

이게 다 뭐냐?
고 묻고 있는 것만 같다

 

 

p. 88
입술

마음이 몸에 있지 않다면
마음 따로 몸 따로 사는 거라면
몸이 마음과 만나는 곳은
입술, 입술쯤일 것 같다

마음의 입구는 입술
마음에 없는 말을
입술이 혼자 들썩일 때
그건 마음이 모르는 마음의 심연을
몸이 먼저 알고 중얼거리는 것

아픈 몸이 마음을 부른다
통증을 건네보자고
마음이 몸을 만나
슬픔을 담아두려 하나
그럴 수가 없다
입술이 열린다

 

 

p. 117
어디 먼 데

어디 갔다 왔어?
네가 물으면
나는 꼭 어디 먼 데 갔다 온 거 같다
부엌에서 물 먹고 왔을 뿐인데
간장 사러 가게에 갔었을 뿐인데

지난여름, 허공인 줄 알고
유리창을 들이받던 실잠자리
들어오려고 들어오려고
성냥골 같은 머리통으로
수없이 그짓을 되풀이하던
투명하고 가느다랗고 가물가물하던

혹시 누구 혼백이 아닌가 싶던
그 실잠자리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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