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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리 <무표정> 2021
<무표정>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9
무표정
월요일이 비처럼 내리는 밤 일요일 밤 여관 같은 밤 화요일이 엿보는 밤 눈과 시선이 겉도는 밤 0과 1사이에 세워진 정신병원을 세는 밤 그림자가 피의 성분으로 느껴지는 밤 따질 수 없는 밤 산 잠자리를 흙 속에 묻고 물을 주는 밤 눈물 대신 혓바닥을 삼키는 밤 훔친 메모지와 훔친 연필이 서로를 노려보는 밤 떠나는 기차 대신 떠나온 금요일을 응시하는 목요일 밤 버림받은 수요일 밤 수태되기 전날 밤 기억나지 않는 밤 구운 쥐가 밥상 위에 오른 밤 앙상한 토요일 밤의 이마를 관총한 총탄 자국 웃는 밤
P. 20
다른 시간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네 목도 늘어났지 어느샌가 고개를 들어도 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 어디에 있니 네 두 발을 네 눈동자인 양 바라보며 소리쳤지 언젠가 네가 물었지 내 해골의 정수리에서 시곗바늘이 돋아난다면 뭘 할래 난 대답했지 불을 붙일래 시곗바늘이 밝히는 어둠 속에서 옷을 갈아입을래 네 꿈속에서 나는 옷이 참 많았지 옷을 껴입을수록 앙상해지는 널 보며 너무 추웠지 옷이 부족했지 꿈이 더 필요했지 네 어둠이 더, 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넌 네 발자국을 따라 이동하는 단두대의 칼날 같았지 째깍째깍 잘려 나가도 줄어드는 건 없었지
P. 26~27
콤플렉스 산책
그녀가 깨진 유리 조각 하나를 보내왔다 잘 깨지지 않는 코렐 접시를 보면 공포를 느껴 너와 함께할 수 없는 이유야라고 적힌 엽서와 함께
그녀는 허리를 숙이는 일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일용할 양식을 찾기 위해서라면 상관없다고 그러나 거울 속을 뒤진 손은 아무리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를 두 번 안았고 그때마다 그녀는 내 품에서 내 바닥으로 우아하게 착지했다 누군가는 이소룡의 무술을 누군가는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 를 누군가는 자기반성을 우아하다고 했지 중얼거리며 세 번 그녀에게 되돌아갔지만 그녀는 서른세 번 나를 버렸다
그녀를 위해 마지막 노래를 준비했다 노래를 부르려는데 음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가 똑같은 곡이 담긴 테이프를 구해 와 틀어주었다 듣고 있는데도 생각나지 않았다 부를수가 없었다
두 개로 갈라진 그녀의 혓바닥 중 왼쪽은 모래성일지도 모른다 나는 왜 파도를 음미할 줄 모르는가 오른쪽을 사랑할 수 없는가
다리를 절며 떠도는 늙은 개를 따라다니다 비에 흠뻑 젖었다 내 신발을 꾸역꾸역 씹어 삼키는 고양이 꿈을 꿨다 난생처음 하이힐을 샀다 하이힐에 목줄을 매고 하루 종일 끌고 다녔다
P. 49
체온
당신의 손을 잡는 순간
시간은 체온 같았다
오른손과 왼손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놓았다
가장 잘한 일과
가장 후회되는 일은
다르지 않았다
P. 51~52
눈, 동냥
잊을 수가 없다
너의 눈을
눈이 아니라 시선을
그 시선이 날 약하게 했다
네, 라고만 말하게 했다
결국 너의 시선이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됐다
너의 시선은 하나의 눈으로 돌아가고
나는 이제 이미지에 야박하다
P. 54
우리 멀리
우리는 공중에서 더 아름답게 춤을 췄다
지는 해와 몸을 부딛치는 순간
등진 채로 서로에게 절을 했다
무대는 우리에게 안부를 묻지 않았다
얼굴 끝까지 덮어쓸 물결이 모자라
온몸이 출렁인다
바위가 되어 숨어 있다
오색 공이 되어 튀어 올랐다
묘기를 부린다
묘기를 부리지 않고
남겨지는 법을 알지 못한다
내 몸에서 네 부재로
대각선 여행을 떠난다
누르는 힘만큼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blue, blue, blue
가라앉지 않는 마지막 인사를 반복하며
별과 별이 떨어진다
p. 63
나뭇가지 끝
서랍 속 독약으로 하루를 연명한다 낡은 아이러니에 앉아 삼월의 나무를 바라본다 지난해의 나뭇잎들이 말라비틀어진 채 매달려 있다 한 계절에서 버림받지 못한 채로 버림받은 것들 죽어서도 아픈 여자에게만 영혼의 길을 물어야 되는지도 모른다
잉어 한 마리가 조그만 어항 안을 빙빙 돈다 자기 몸이 그리는 원에 매달려 파닥인다 나뭇가지 끝이 흔들린다 폭우가 쏟아진다 어항이 깨진다 잉어가 끝없이 떨어진다 끝이 자란다 찌르면서 찔린다 피로 물든 손잡이 열리지 않는 문이 닫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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