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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아껴 먹는 슬픔] 유종인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2. 20.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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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인 <아껴 먹는 슬픔> 2001

 

 

 

場(장): 마당 '장' 많은 사람이 모여 여러 가지 물건을 사고파는 곳. 여러 가지 상품을 사고파는 일정한 장소.

罷場(파장):파할 '파', 마당 '장'  장이 파하는 것. 모임이 거의 끝남

生前(생전): 날 '생', 앞 '전'

死後(사후): 죽을 '사', 뒤 '후'

 

 

 

 <아껴 먹는 슬픔>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2
팝콘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꽃,
꽃은 열매 속에도 있다

단단한 씨앗들
뜨거움을 벗어버리려고
속을 밖으로
뒤집어쓰고 있다

내 마음 진창이라 캄칼했을 때
창문 깨고 투신하듯
내 맘을 네 못으로 까뒤집어 보인 때
꽃이다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속을 뒤집었다, 밖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은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꽃은
견딜 수 없는 嘔吐

나는 꽃을 집어먹었다

 

嘔吐(구토): 게우다, 토하다, 기꺼이 말하다, 노래하다 '구', 토할 '토' 먹은 음식물을 토함

 

 

p. 14~15
옹이

벽지는 나무 속을 흉내내고 있다
통나무를 세로로 켠 나무의 내장을
빈틈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결과 결기 엇갈려
삼각파도처럼 일어서는 꼭지점엔
바람의 속이 들어 있다

결과 없는 이란
때로 완벽한 적멸에 이른 것인가
거스르지 못한 자들이
숨결과 함께 순결을 물어보고 있다

외따로 맺혀보지 못한 결들도
제 딴엔 맴돌며 다른 가지로 나가는 길을
옹이로 눈뜨고 있다

제 눈을 자기고 제 길을 살피려는
둥근 결들의 나이테, 군데군데의 늪처럼
제자리서 썩어가는 눈을 외곬이라 불러도,

결대로 쳐내지 못한 打者의 공들은
자꾸 뒤로뒤로 과거의 백-넷을 친다

언젠가 오래된 나무판자로 지은 변소에 앉아
옹이 구멍으로 뚫린 밖에
노란 애기똥풀꽃이 피어난 걸 본 적 있다
옹이로 맺힌 씨앗이 더 이상 길을 다물고
한 해를 더 건너기 위해 땅에 떨어진 걸 보았다

 

옹이: 나무의 몸에 박힌 가지의 밑부분. '굳은 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가슴에 맺힌 감정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生(생): 날 '생'

적멸: (불교) 사라져 없어짐, 곧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세계를 영원히 벗어남 또는 그런 경지.

외곬: 단 한 곳으로만 트인 길. 단 하나의 방법이나 방향.

打者(타자): 칠 '타', 사람 '자'

 

 

p. 26~27
아껴 먹는 슬픔

재래식 화장실 갈 때마다
짧게 뜯어가던 두루마리 화장지들
내 밑바닥 죄를 닦던 낡은 성경책이 아닐까
떠올린 적이 있다

말씀이 지워진 부드럽고 하얀 성경책 화장지!
畏敬의 문밖에서 누군가 나를
노크할 때마다 나는
아직 를 배설 중입니다 다시
문을 두르려주곤 하였다

바닥난 화장지, 어느 날 변기에 앉아
내 죄가 바닥나버린 허탈에 설사라도 나는
기분에 울먹인 적이 있다

그러나, 천천히 울어야지
저 문밖의 가을, 깃동잠자리 날개 무늬를 살필 수 있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머리에 토란잎을 쓰고 가는 아이처럼
슬픔에 비 맞아 가는 것도
다 구경인 세상이듯이

때론 맨발에 질퍽이는 하늘을 적시며

 

畏敬(외경): 두려워 할 '외', 공경할 '경 / 공경하면서 두려워 함.

罪(죄): 허물 '죄'

 

깃동잠자리

이미지 출처: 두산백과

토란잎: 달걀 모양의 넓은 타원형. 잎몸은 길이 30~50cm, 나비 25~30cm정도 된다.

이미지 출처: 두산백과

 

 

p. 32~33
시궁쥐와 해바라기

깨진 하수도관 밖으로 나온 시궁쥐,
눈이 부시다 어둠이
얼마나 깊은 빛을 품게 했는지
눈물이 다 핑 돈다

해바가리는 까맣게 탄 가슴 얼굴로
시궁창이 뭐냐고, 도대체
굴욕이 뭐였냐고
쥐를 내려다보고 있다

열심히 해바라기 줄기를 타고 오른다
그 넓은 잎사귀를 뒤적거리다
해바라기 까만 얼굴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후벼 파고 있다. 검은 씨앗 속의 여름을
그해의 기억을 파먹는 시궁쥐, 해바라기는
바람도 없이 심하게 흔들린다

굴욕은 어디에나 달라붙는다. 해는
가장 높은 곳에서 바닥을 내닫고 있다
해의 여자가 된 해바라기는
빛의 私生兒가 잠든
해바라기 얼굴에 겉씨로 슬려 있다

시궁쥐는 씨앗 속의 잠을 파먹고 있다
씨앗 껍질이 한 됫박쯤
땅에 쌓였을 때, 시궁쥐는 툭 하고 
땅에 떨어진다

얼굴이 파먹힌 해바라기, 실성한 노인처럼
배부른 시궁쥐를 내려다보고 있다

굴욕이 뭐냐고?
기억마저 없다는 것, 욕보지도 못했다는 것!
굴욕은 잃어버린 것마저 모르는 일이다

시궁쥐가 되돌아간 시궁창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다

 

私生兒(사생아): 사사로울 '사', 날 '생', 아이 '아'

 

 

p. 52
가을 하늘

하늘이 더 깊어진 것이 아니다
눈앞을 많이 치운 탓이다

밥그릇처럼 뒤집어도
다 쏟아지지 않는 저 짙푸른 늪같이

떨어지는 곳이 모두 바닥은 아니다
열린
바닥이 끝없이 새떼들을 솟아오르게 한다

티 없다는 말, 해맑다는 말!
가을엔 어쩔 수 없다는 말, 끝 모를 바닥이라는 말!

바닥을 친다는 것, 고통을 저렇게 높이 올려놓고
바닥을 친다는 것
그래서, 살찌고 자란다는 것!

당신이 내게 올 수도 있다는 것
변명은 더 이상 깊어지지 않는다는 것!

 

 

p. 66~67
건널목

내리실 분이 없으시면
그냥 통과하겠습니다!

그러나, 차단기가 내려졌다
숨 막히는 기억이 단숨에 치닫겠단다
칸칸이 사연이란다
창문을 달아 조는 모습이라도 보여주겠단다

왜, 갑자기 변명할 세상이 사라진 것일까?
텅 빈 우물을 싣고 가는 완행버스,
아무도 퍼 가지 않는 그 속에
두레박줄처럼 길이 떨어지곤 했다

내린 곳에서 내린 사람들은
내 안에 살지 않는다

잘못 내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냥 지나친 걸 인정하자

죽음 앞에 내려져 있는 차단기, 그러나
죽음을 길게 늘이고 있는 길, 잘못
내렸다는 생각은 거기서부터 왔다

멈출 수 있다면 기차는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물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버스는 목마름을 털털거렸다

通過만으로도 상처가 되는 길, 그 두 줄의
새하얀 은빛에 햇살이 베이고
먼지가 다시 내려앉는다

죽음은, 脫線할 때까지 계속된다

 

通過(통과): 통할 '통', 지날 '과' 어떤 곳이나 때를 거쳐서 지나감. 멈추었다가 가도록 예정된 곳을 그냥 지나침.

脫線(탈선): 벗을 '탈', 줄 '선' 기차나 전차 따위가 바퀴가 선로를 벗어남. 말이나 행동 따위가 나쁜 방향으로 빗나감. 목적 이외의 딴 길로 빠짐.

 

 

p. 104~105
누룽지

보리가 섞인
흰밥을 그릇 바닥에 펴 누룽지를 만든다. 언제부턴가
나는 좀 딱딱한 말들의 밥알을 씹기 좋아했다!
너무 부드러운 건 진실이든 아니든 믿음의 위장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그대들의 질거나 된 삼층밥의 하얀 진실들이 제각기 설익음으로 뜨거워지고 있는 사이에도
그 밑바닥, 눌린 밥풀들이 아우슈비츠 유대인처럼 신음으로 엉켜 죽은 듯
그 몰상식한, 아니 몰살당한 歎聲의 딱딱함을 즐긴다

바닥을 긁는,
긁는 바닥의 마지막 비참을 나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더 이상 긁을 게 없는 바닥의
꿈을, 폐허조차 없는 밑바닥을
고소한다, 아니
고소하다!

껍질은 이제 가장 나중의 속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나를 베끼지 마라

나는 풋것들의 인연으로 눌려 있다 아직 젊음이라고 나를 태운 것들!
처음의 불의 혓바닥을 끝물까지 간음했다
이제, 바삭바삭하다!

 

歎聲(탄성): 탄식할 '탄', 소리 '성' / 몹시 한탄하거나 탄식하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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