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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 <오늘 아침 단어> 2011
영화 <좋아해줘>에서 정성찬(김주역)의 코치를 받으며 함주란(최지우)이 페북에 올릴 사진을 찍는 장면중에 나오는 시집.
p. 12~1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벽 한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제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 찾아올 곳이 없다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이 간판이 하나 걸린다
때 절은 마룻바닥에선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당신을 한 벌의 수저와 묻는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무덤
먼지의 뒤꿈치들, 사각거린다
p. 16
한편
눈물이 울고 눈은 울지 않는다
나보다 먼저 소요가 일어났다
떨고 있다 떠는 것이 있다
내게 고인 것들이 불쌍하지만,
어차피 위선 아니면 위악
용서받을 것이 아니다
경계가 경계를 경계하고
숫자를 세는 일은 지겹지 않다
끝나지 않으면 잃어버린 거지
그런 건 찾지 않는 게 좋다
먼 외국의 일은 잊어도 할 수 없다
힘은 무겁다 이름은 가깝고,
누구나 너무 자주 생각한다
세계는 생각의 덩어리진 형태
생활은 오쟁이 진 모습 그대로
흑백의 거리가 어둑어둑해진다
비극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결론의 집에서 산다
오쟁이: 짚으로 엮어 만든 작은 섬(섬: 곡식 따위를 담기 위하여 짚으로 엮어 만든 그릇. 부피의 단위 - 한 섬은 한 말의 열 배로 약 180리터에 해당한다.)
p. 18~19
어떤 연대기
우리는 어떤 연대기를 생각하고 그 위로 밤이 내린다 한 사내가 그 밤을 다 맞으며 걸어간다 그의 등에선 해묵은 종이의 냄새가 난다 그는 한 집 앞에 서서 손잡이를 돌려 당긴다 그는 어깨를 털고 집으로 들어간다 그뿐이다 그가 없는 거리는 텅 빈다 그가 걸어 온 흔적이 지워진다 없으므로 이따금 죽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잠시 고요하다
이 연대기에는 가구의 흔적이 있다 우리는 잠시 일어났다가 앉는다 하얗게 변한 길이 무섭기 때문이다 무거운 것을 볼 때면 대개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어지러운 까닭이다
하나둘 불이 켜지는 시간이 되면 창문에 그려진 사내의 삶은 숨겨둔 술을 꺼낸다 그에게는 손을 떠는 습관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와 이 연대기를 기다려야 한다 언제나 그러하듯 슬픔은 완성되지 못한 채 낡아가는 집 같아서 사내는 붉어진 얼굴을 견디고 젖은 어둠이 흘러들어온다 어둠이 곧 촛불을 끌 것이다 한숨에도 흔들리는 사람이란 그런 것이다 그는 잠들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연대기의 한 장을 찢어 내야 한다 밤은 언제나 찾아오므로 그가 꾼 꿈을 들춰볼 자격이 우리에겐 없으므로
p. 24
내일, 내일
둘이서 마주 앉아, 잘못 배달된 도시락처럼 말없이, 서로의 눈썹을 향하여 손가락을, 이마를, 흐트러져 뚜렷해지지 않는 그림자를, 나란히 놓아둔 채 흐르는
우리는 빗방울만큼 떨어져 있다 오른뺨에 왼손을 대고 싶어져 마음은 무럭무럭 자라난다 둘이 앉아 있는 사정이 창문에 어려 있다 떠올라 가라앉지 않는, 生前의 감정 이런 일은 헐거운 장갑 같아서 나는 사랑하고 당신은 말이 없다
더 갈 수 없는 오늘을 편하게 생각해본 적 없다 손끝으로 당신을 둘러싼 것들만 더듬는다 말을 하기 직전의 입술은 다룰 줄 모르는 악기 같은 것 마주 앉은 당신에게 풀려나간, 돌아오지 않는 고요를 쥐여 주고 싶어서
불가능한 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신이 뒤를 돌아볼 때까지 그 뒤를 뒤에서 볼 때까지
生前(생전): 날 '생', 앞 '전' 일전에 경험한 적이 없음을 나타내거나 자신의 표현 의도를 강조하는 말(유의어: 난생. 사전. 살아생전)
p. 28
금요일
검은 옷의 사람들 밀려 나온다. 볼펜을 쥔 손으로 나는 무력하다. 순간들 박히는 이 거룩함. 점점 어두워지는 손끝으로 더듬는 글자들, 날아오르네. 어둠은 깊어가고 우리가 밤이라고 읽는 것들이 빛나갈 때. 어디로 갔는지. 그러므로 이제 누구도 믿지 않는다.
거기 가장 불행한 표정이여. 여기는 네가 실패한 것들로 가득하구나. 나는 구겨진 종이처럼 점점 더 비좁아지고, 책상 위로 몰려나온 그들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 그러니 불운은 얼마나 가볍고 단단한지. 지금은 내가 나를 우는 시간. 손이 손을 만지고 눈이 눈을 만지고, 가슴과 등이 스스로 안아버리려는 그때.
p. 42~43
오늘의 바깥
서점에는 성기처럼 뭉툭한 아이가 앉아 있었다 사다리 위로 올라간 직원의 얇은 블라우스 속으로 살이 내비쳤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날갯죽지처럼
기억은 기억이 괴롭힌다 치마 아래 하얗게 일어난 보풀 같은 사람 뜯어낼수록 점점 더 많아지다가 버려지는
어떤 때는 돈 세는 소리를 닮는다 점점 쌓여 올라가는 높이 누구나 그런 언덕을 가지고 있다 서로의 변덕스러운 높이를 외우는 것이 하루 일의 전부 그리고
새벽에 들은 매미 소리를 펴서 읽다가 날개와 등사이 벌어진 틈으로 운다 사람의 옆에 붙어서 비집고 들어가 보면 없고 그럴 때면 나는 분주하게 나를 찾고
밤이 되면 누구나 혼자 눕는다 이 익숙한 일을 해내기 위해 아침이면 길고 가는 선이 놓이고 하지만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윽고 모든 것이 깜깜해지면
바깥이란 얼마나 흐릿한 것인가 오늘, 처럼 쓰기 쉬운 단어가 또 있는가 누군가의 냄새, 누군가의 감촉, 누군가가 놓고 내린 체온 이 우스운 일들을 얼마나 반복해 뒤집어야 하는지
p. 46
화가의 방
그 책장 가장 어둔 구석에 꽂혀 있는 책은 아무도 읽은 적 없는 한 화가의 생애 그는 한 칸의 방을 그리기 위해 일생을 걸었고 완성하지 못한 그림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어둡고 비좁은 골목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은 자신의 방 안을 생각한다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불꽃 그 속에는 빈 어머니와 빈 동생들과 빈 뒷모습 빈 그림자 빈 원망이 흔들린다 어디서 무거운 소리가 들리고 도저히 올 것 같지 않던 시커먼 시간이 찾아온다 누가 생의 무게를 재어보는가
나는 내 방 구석 책장으로 걸어가 한 권의 책을 꽂아 넣으려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조각난 햇빛을 보고있다 또한 화가가 그리지 못한 그 방은 스스로 얻은 무채색의 두려움을 삼키고, 좀더 어두운 곳에 숨을 것이다
p. 58~59
손의 전부
눈이 내리던 날 흔들리는
막차에 놓여 흔들리던 내 손이
죽어가고 있었다 젖은 코트처럼
어둡고 두꺼워 더는
움직이지 못하는 그것은
봄이었고 여름이었던
분명한 한때,
누구에게나 있었던, 한 번쯤은
모든 것이 내 것이었던
그때
바람이었다가 물 흐르는 소리처럼
어루만지고 이따금 꽉 쥐었던,
사람의 적막
사라져버려 더는 내 것이지 않은
온도, 라고 쓴 적이 있었다 결국
내게는 창백한 것들이 사랑이다
내 손이 죽었을 때 손이 받아낸
모든 이름들 다 죽어간다
놀랍도록 검고
어마어마하게 차갑게
인사, 를 전한다
작별을 통과하는 일
그것이 손의 전부다
p. 68~69
비밀의 풍경
낡은 거리 위로 아무도 걸어가지 않는다 거기, 쓰러진 그림자들 사이에 내가 있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구름이 지나간다 나는 울음을 믿지 않았으므로 알사탕을 문 아이처럼 울고 싶었다
어둠이 걷히자 모든 것이 반짝인다 반짝이지 않는 것은 모든 것에 포함되지 않는다 미끄럽고 가벼운 잠결에 태어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차가운 손을 내놓고 있다 그건 누군가 찾아오는 소리 같고 나는 닫을 준비처럼 보인다
아니면 나는 누군가의 회색 코트 위에 서 있다 그런 일은 습관이다 이맘때 누구나 나눠 갖는 비밀 같은 것 그러므로, 누군가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리거나 표정을 삼켜버리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대해서는 적지 않는다
그 위에서, 나는 무엇을 빌려야 했을까 영문 없이 말라 바스러지는 기억들, 날아가 흩어진다 어떻게 되었든 나는 계속 지나갈 것이다 먼지 묻은 어둠을 털어내며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너무 거칠고 투명하다 그래,
누구나 그렇길 바란다고 나는 중얼거린다 아니 중얼거린 건 내가 아니고 나는 들었는지도 모른다 잠깐 어깨가 움츠러든 가까운 곳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거나 수그려도 나는, 이제 보이지 않을 것이다
p. 116
맑은 날
짬뽕이란 단어는 어떻게 발음해도 슬퍼지지 않는다
단단히 묶인 팔자 매듭처럼 풀리지 않는 숙취는
이토록 웃기다 거진, 습관이란 게 그런 거지만,
물에서 짬뽕 국물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새인지 비행기인지 모를 것이 떠 있는 하늘에서
뭐가 내릴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날엔 내게 없는
아내가 식탁에 앉아 펑펑 쏟는 눈물을 보고 싶다
그 앞에서 재떨이를 끌어당겨 담배를 물고
아내를 지켜보는 단답형 남편이 된 것도 같고
그런 게 어떤 기분인지 알 길 없는 것도 당연하다
도저히 착해지지 않는 마음을 뒤져보아도
도무지 길들여지지 않는 글자만 가득할 뿐 그러니
짬뽕이란 단어는 조금 슬프고 너무 웃기기도 해서
생활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오늘 아침엔
대단한 물건인 양 배달되어온 책을 받아들고
이름 석 자 장중하게 적어주는 내가
똑같은 글자를 자꾸 적고 비실비실 웃는
혀를 쥐어짜 사과라도 해보려 하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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